EP 4. 오컬트 마니아가 마주친 오고오고 퍼레이드. 발리(3) - 우붓
오컬트.. 좋아하시나요?
나는 참 좋아합니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아담스 패밀리와 비틀쥬스.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은 크리스마스의 악몽.
어릴 때부터 세일러문보다 세계 미스터리 전집을 더 열심히 찾아보고 현재까지 크리스마스보다 할로윈을 더 좋아하는 동네에 소문난 오컬트 마니아입니다.
취향이 이러니 만큼 수많은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물론 멕시코의 <죽은 자들의 날>을 보는 것이었는데요.
이번 여행에는 일정 상 어려울 수도 있어 (그전에 여행이 끝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쯤 마음을 내려놓고 있던 나에게 길리에서 머물렀던 호스텔의 한 직원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건 바로 발리 본토 섬에서 이제 곧 악마들의 퍼레이드가 열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퍼레이드를 정확히 알려면 퍼레이드 다음날에 있는 발리의 명절 <녜삐 데이>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슬람교가 대부분인 인도네시아 본토와는 달리 인구의 85%가 힌두교를 믿는 발리에서만 기리는 특별한 명절, 침묵의 날 (Silent day) 녜삐 데이.
힌두력으로 신년에 해당하는 날 오전 여섯 시부터 딱 24시간 동안 이루어지는 일명 <정화의 날>로 악마와 귀신 등 부정한 것을 내쫓고 몸과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 명상을 하며 보낸다는. 발리의 가장 큰 명절 중 하나입니다.
연휴 당일엔 빛과 전기, 외출, 식사, 업무 등 모든 것이 금지되고 심지어 공항까지 셧다운 된다고 하니 발리에선 얼마나 특별한 날일지 대략 감이 오실 겁니다.
내 정신을 쏙 빼놓은 오고오고 퍼레이드는 그 녜삐 데이 바로 전 날 열리는 행사입니다.
퍼레이드 이름에 들어가는 오고오고란 발리어로 흔들리다(ogho-ogho)라는 뜻을 가진 종이와 대나무 등으로 만든 악마 인형입니다.
균형을 중요시하고 선한 신과 악한 신, 모두를 기리는 발리에서는 한 해의 마지막 날 지상으로 올라오는 악마들을 달래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낸 다는 의미로 이런 세리머니를 치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퍼레이드 자체는 그렇게 역사가 길지 않다고 하네요.)
가능한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형태로 인형들을 만들고, 행사가 끝난 마지막 날 불로 태워버림으로써 섬 전체를 정화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해요.
보통 힌두교를 믿는 국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본토 종교와 힌두교가 어우러진 발리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행사라고 하니, 오컬트와 역사에 환장하는 나에게 내려온 상인가? 싶을 정도의 행운이었습니다.
우붓에 도착한 날부터 도시 이곳저곳에 보이는 수많은 악마 인형들과 전통 악기가 함께하는 전야제들은 나를 들뜨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분명 마을 단위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만든다고 들었는데 그 퀄리티가 얼마나 어마어마 한지 인형을 구경만 해도 지루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동네 구석구석 숨어 있는 인형들을 찾아 돌아다니며 변태 같이 사진을 찍어 대던 며칠이 지나고, 드디어 기다리고 고대하던 오고오고 퍼레이드 날이 다가왔습니다.
오후 다섯 시가 지날즈음부터 밤새 불을 밝히던 우붓 거리의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습니다.
오후 여섯 시가 지날즈음부턴 이 많은 사람이 대체 어디에 숨어있었던 거야? 싶은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내 통제된 도로의 철제 바리게이트 너머로 전통 복장을 한 학생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목마를 타고 나무 위로 오르며 좋은 자리를 선점하려는 여행객들과 현지인들을 구경하던 와중 딸랑딸랑 영적인 느낌을 주는 발리의 전통악기와 함께 본격적인 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약간의 공연 후 이름에 걸맞게 악마들의 퍼레이드가 시작될 거라고 생각한 것과 다르게 쌍쌍의 오고오고들이 나와 각 인형의 의미를 담은 춤과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형태의 공연이 차례대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렇게 한두시간 정도 천천히 진행되는 행사를 보고 있자니
조금은 지루하지 않나..?라는 마음이 삐죽 튀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초롱초롱 행사를 지켜보던 눈은 점점 동태눈이 되고, 뛰어나갈 듯 앞으로 쏠려있던 몸뚱이는 이내 짝다리를 짚은 채 삐딱하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심드렁한 마음에 이제 슬슬 숙소로 돌아갈까?라는 생각이 들던 와중 불량한 자세로 펜스에 기대 턱을 괸 채 지켜보던 나의 앞으로 퍼포먼스를 끝마친 땀에 흠뻑 젖은 학생들이 뛰어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내가 자리 잡은 통제된 도로 끝자락은 퍼포먼스를 마친 사람들이 오고오고를 내려놓고 다른 퍼포먼스를 기다릴 수 있게 한 일종의 휴식 공간이었습니다.
얼핏 본 학생들은 아주 들뜨고 신나 보였습니다.
나는 심드렁하게 쳐다보던 오고오고들에서 시선을 돌려 학생들을 훔쳐보기 시작했습니다.
몇 개월이나 준비했을 하나의 공연을 무사히 끝낸 그들은 시끄러운 음악소리를 뚫을 만큼 크게 환호하며 서로 부둥켜안고 준비한 음료를 나누어 먹었습니다.
무거운 종이인형을 움직이느라 지쳤을 만도 한데, 땀에 흠뻑 젖어 바닥에 주저앉았을지언정 한껏 지은 미소는 없어질 줄 몰랐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스스로가 참 건방지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이 행사는 몇십 년. 혹은 그 이상 이어온 그들의 것이고, 각자 그마다의 의미가 있을 텐데. 알지도 못하는 내가 운 좋게 행사의 일부를 그것도 무료로 구경하면서 별로라고 쉽게 판단을 내렸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오고오고 행사는 지루하다고 결론지을 자격이 나에게는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나의 시선을 사로잡던 힘차게 움직이는 화려한 악마의 인형들이 아닌. 그 인형을 메고 있는 학생들의 표정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혹여라도 인형을 놓칠까 싶어 입술을 깍 깨물었으면서도 잔뜩 신나 보이는 표정들.
약간은 절도가 부족해도 한껏 심취한 그들의 몸동작들.
더운 날씨에도 웃음이 가득한 행사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얼굴들.
그제야 나는 한낱 여행객일 뿐이고, 내가 여행지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은 그들의 것. 그들의 삶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의 한 조각 만을 스쳐보며 그들의 지켜온 것들을 제대로 보고 느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 조금 아까워졌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더 그들의 이야기를 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깐 들린 여행객이 쉽게 내린 쉬운 결론이 아닌. 내가 본 모든 것들에 담긴 진심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는 태도로요.
그러자 사람들의 힘찬 몸놀림에 맞춰 위 아래로 열심히 움직이는 오고오고 인형들이 조금씩 다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
그리고 우붓을 더 추억하게 해주는 특별한 기억 세가지.
1. 힌두교 색을 띈 석상들.
발리의 생활 모든 것에 스며든 종교. 종교 예술을 좋아하는 나에겐 어딜 가든 보이는 모든 석상들이 즐거움이었다. (특히나 우붓 기후로 이끼 낀 모습이 멋짐을 더욱 더해준다!)
2. 강아지들
고양이를 선호하는 이슬람 교리에 맞춰 강아지는 볼 수 없었던 길리와 달리 섬 여기저기를 활보하던 강아지들.
...그리고 원숭이.
3. 친구
바쁜 시기 회사에서 도망친 나쁜 사람을 위해 소중한 휴가를 써준. 전 팀원 이자 소중한 친구 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