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아침 아홉 시 밖에 되지 않았는데 직원이 이리 정신없는 걸 보니 빨간 날 이긴 빨간 날이었다. 문이라고 생긴 것들은 모조리 열린 카페는 건물이 가지고 있는 열기를 모조리 뿜어낼 것 같았다.
카페 직원은 내 발소리만 듣고도 자동응답기처럼 인사했다. 직원은 바빠 보였다. 나는 잠시 기다리며 직원이 숨 돌릴 타이밍만 보았다.
저기, 주문할게요.
뒤돌아본 카페 직원의 볼은 새 빨겠다.
“주문하시겠어요?”
“따뜻한 바닐라라테 하나, 아이스 아메리카노 산미 있는 걸로 하나요.”
따뜻한 바닐라 하나. 아이스 아메리카노 산미 하나.
내 말을 똑같이 따라 하며 직원은 신중히 포스기에 메뉴를 입력했다.
그런데 나는 포스기에 찍히는 화면을 보며 눈을 의심했다. 흰 바탕화면에 HOT 바닐라 HOT아메리카노 글자가 찍혀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원은 결제하기 전 ‘아이스’ 맞으시죠? 라며 내 눈을 바라보고 재차 확인하였다.
나는 직원을 믿었다.
여러 잔이 나간 뒤 드디어 커피를 받을 차례가 왔다.
아, 이런.
비닐캐리어에 얌전히 따뜻한 커피 두 잔이 담겨있었다. 땀에 젖은 미소를 짓는 직원. 나는 난감했다.
저기 죄송하지만, 아이스 아메리카노 시켰어요. 목구멍을 타고 나오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그런데 갑자기 나한테 커피를 건네주려던 직원이 사색이 되어 급하게 휴지뭉치를 꺼냈다.
무슨 일 인가 싶어 보니 비닐 안에 아메리카노가 조금 샜다. 거기다 계산대 앞에 다른 손님들이 계속 줄 서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새 비닐에 담아드릴게요!" 라며 직원은 눈에 띄게 허둥지둥 댔다. 나는 그런 직원에게 차마 뭐라 할 수 없어 가만히 기다렸다.
1분도 채 되지 않는 기다림이었다.
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긴 1분이었다.
나는 끝내 아이스를 시켰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감사합니다 한 마디만 했을 뿐이다.
카페 직원은 안도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카페에서 나와 몇 걸음 걸었을까.
내리쬐는 햇빛은 너무 뜨거웠다.
손에 쥔 커피도 뜨거웠다.
뜨거움을 손에 쥐니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러고 보니, 나도 그랬던 거 같은데.
그래, 나도 그런 적 있다.
하필 단골손님을 상대로 말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주문 그까짓 거, 내가 기억하면 된다는 생각에 말로는 아이스를 외치고 손으로는 스팀피처로 우유를 뜨겁게 데웠었지. 정말 뜨거운 날이었는데 말이야.
주문하신 따뜻한 라테 나왔습니다~! 나는 당당히 말함과 동시에 아차 싶었다. '많이 바쁜가 보다, 그죠?'다정한 목소리였다.
단골손님은 어깨까지 오는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으며 ‘아하하. 아이스… 시켰는데요. 괜찮아요’ 라며 미소 지어 보였다.
가끔은 따뜻한 것도 마셔줘야 한다면서.
그때 나는 죄송한 마음과 동시에 손님이 별말 없이 넘어가줘 다행이다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와 생각해 보니, 그분의 그런 태도 덕분에 나는 그날 하루를 망치지 않았다.
(물론, 잘못 나온 음료는 바로 말해서 꼭 자신이 주문한걸 다시 받아야 한다!)
하루에 한 번쯤 타인의 실수를 너그러이 넘어가는 순간은 괜찮은 것 같다.
서로 인상을 찡그리지 않는 무더운 날은 꽤 좋은 날을 보내게 해주기도 하니까.
우리는 각자 가지고 있는 전쟁을 매일매일 치르고 있다고 누군가 말했었지.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든다.
나까지 타인의 전쟁에 끼어들 필요가 없다고.
단골손님이 내게 그랬듯, 그 카페 직원에게도 나의 태도가 다행인 순간이었기를.
그리고 더운 날 따뜻한 커피, 생각보다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