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란 오류

by 카폐인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한이결, 그 사람의 여동생에게 휴머노이드를 언제 소개해 줬는지. 아무리 기억의 조각을 그러모아 보려 해도, 마치 홀로그램 영상이 깨지듯 지지직거릴 뿐 선명한 그림은 떠오르지 않았다. 내게 남은 건, 얼어붙을 만큼 싸늘했던 그 빈소의 잔상뿐이었다.


애초에 나는 그 애 얼굴조차 본 기억이 없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건 동생 해나가 같은 과에 절친이 생겼다며 지나가던 말을 들은 것뿐이었다. 대체 어떻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풀리지 않는 의문이 묵직하게 가슴을 눌렀다. 단순한 건망증이라고 하기엔 석연찮은 구석이 너무 많았다. 내 머릿속 어딘가에 오류라도 생긴 걸까.


혼자서 무거운 마음을 안고 걷던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요?”


깜짝 놀라 돌아보니 정구현이었다. 그는 언제나 갑자기 나타나는 게 특기였다.


정구현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내 앞에 허리를 숙이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는 파란 나선이 미세하게 돌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얼굴은 수술의 흔적 하나 없이 완벽했다. 차가운 금속과 부드러운 피부 조직이 어떻게 저토록 자연스럽고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지, 볼 때마다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가 자부심을 가질만한 얼굴이었다. 비록 내가 사고 이전의 그를 본 적은 없지만.


나는 멋쩍게 웃으며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교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음? 어떤 거를요?”

“당신의 얼굴과 내 얼굴.”

“안 돼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정구현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이게 얼마짜리 얼굴인데요! 그런 무서운 말을 함부로 하시다니.”


키 큰 남자가 벽에 몸을 밀착한 채 얼굴을 가리고 혼잣말하는 모습이 이상했던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정구현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어린아이처럼 구는 면이 있었다. 좋게 말하면 지나치게 밝은 성격을 가진 하프 휴먼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모습과는 다르게 늘 침착하고 믿음직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외형이 어떻든, 나에게 정구현은 이 각박한 세상에서 몇 안 되는 속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동료였다.


내가 한참을 말없이 서 있자, 정구현이 얼굴을 감싼 손가락 틈 사이로 눈동자를 굴리며 물었다.


“표정이 어둡네요. 무슨 일 있어요?”


망설였다. 기억이 조각난 휴머노이드 사건을 그에게 털어놓아도 될까. 하지만 언제나처럼 그의 파란 눈빛은 내게 안정감을 줬다. 그래, 정구현이라면 뭔가 다를지도 모른다.


“사실은…” 결국 나는 한숨과 함께 말을 꺼냈다. 갑자기 맡게 된 사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려진 폐기 결정, 한이결과 그의 여동생, 그리고 정체 모를 휴머노이드까지. 횡설수설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정구현은 눈을 맞추며 조용히 들어주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어떤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 이야기가 끝난 후 그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이윽고 눈에 짙은 파란빛이 스쳤다.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가 무언가 짚이는 게 있다는 걸. 휴머노이드 수리기사인 그가 내가 미처 놓친 무언가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이 답답한 기억의 실타래를 푸는 데 정구현이 결정적인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기대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그의 다음 말에 처참히 무너졌다.


“그랬군요. 그럼, 작년 초에 우리 회사 ‘연인 버전’ 초기 시연 모델을 신청한 게 백사자 씨였어요? 그 휴머노이드, 원래는 보름 후에 점검받아야 하는데 제가 삼일 만에 급히 출동했었죠. 어쨌든 한이결 소장 동생 사건 때문에 회사 전체가 한동안 쥐 죽은 듯 숨어 지냈잖아요. 정확히 말하면, 어린 대표님이 충격을 받아 그랬던거지만요.”


나는 그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눈만 멍하게 깜빡였다. 손끝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잊고 있던 기억의 미세한 조각들이 천천히 떠올랐다.


이벤트 신청서에 가볍게 사인을 하던 내 손, 보름 사용 예정인 휴머노이드와 함께 도착한 설명서.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동생에게 맡겨 버리곤, 나는 그 행방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혹시 필요하면 소승우한테 그때 기록 찾아서 보내달라 할까요?”


그의 목소리가 내 귀에 제대로 들어올 리 없었다. 여태껏 나는 누구에게 피해를 주며 살지 않았다고 자부했다. 특별한 인생은 아니었지만, 맡은 바는 책임 있게 살아왔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때의 가벼운 내 서명이 타인의 죽음을 이끌어냈다니.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저 멀리서 “백사자 씨!”라고 부르는 외침을 무시하며 걷기 시작했다.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땅만 바라보며 정신없이 걸었다. 그렇게 모퉁이를 돌던 나는 바보같이 누군가와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앗, 죄송합니다.”


급히 옆으로 비켜 가려했다. 하지만 내 앞을 막고 선운동화가 같은 방향으로 따라 움직이며 길을 막았다. 무심코 시선을 들어 상대를 확인하는 순간, 심장이 얼어붙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 속에 날카로운 비난이 담겨 있었다.


“죄송하다는 말은.”


목소리에는 약간의 비웃음, 그리고 경멸이 섞여 있었다.


“작년에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한이결이었다.

그녀의 눈은 일말의 감정도 없었다.

깊고 어두운 우물을 들여다보듯 서늘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순간만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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