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잔류

by 카폐인


“헉, 헉…”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몇 번이나 발을 헛디뎠고, 입안에서는 날카로운 피 맛이 돌았다. 나는 무작정 도망치는 쪽을 택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녀를 마주하는 게, 그 싸늘한 얼굴과 시선을 직면하는 게 두려웠다. 하지만 도망치는 것조차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처음 와 본 낯선 골목 계단에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여기까지가 나의 한계였다.


경찰을 피해 숨어든 범죄자처럼 두려움에 떨며 숨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내가 달려온 골목 끝에서 발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지만, 한 걸음씩 무겁게 나를 향해 다가오는 소리였다.


한이결은 뛰지도, 나를 다그치지도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나는 최후를 예감한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서 내 목을 분리시켜 달라는 듯, 그녀 손에 분해될 휴머노이드의 마지막 순간처럼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소리가 멈췄다. 나는 조심스레 눈을 떴다. 내 시선 앞, 아주 가까운 곳에 운동화 한 켤레가 고요히 멈춰 있었다.


곧이어 한이결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고요한 공간을 미세하게 흔들었다.


“왜 도망친 거야?”

“……”

“내가 무서워?”


그녀의 질문에 조심스럽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운동화 위로 가죽 재킷이 먼저 보였다. 마치 형사가 입을 법한 무겁고 견고한 느낌이었다. 한이결의 얼굴은 냉정했다. 아무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그녀의 눈동자가 나의 내면을 샅샅이 훑고 있는 듯했다.


나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변명도, 해명도 꺼낼 수 없었다.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목에 걸려, 숨이 막히듯 입을 막았다. 아마도, 그건. 내가 외면해 온 죄책감일 것이다.


숨 막히듯 무거운 침묵 속, 한이결이 가죽 재킷 주머니에서 낡은 폴더폰을 꺼내 들었다. 폴더를 여는 순간, 흰색 불빛이 번쩍이며 내 얼굴을 비췄다.


“당신이 하트랩 직원 됐다는 얘기 들었을 땐, 기가 막히더라.”


그리고 작은 화면을 응시하던 한이결의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 뭐야, 당신. 인간이었어?”


그녀가 나를 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깐의 침묵 끝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그녀가 나를 '인간'이라고 지칭했다는 건, 지금까지 하트랩 내부에서 온전한 인간은 나 하나뿐이라는 뜻이다.


휴머노이드, 하프휴먼.

나는 오랫동안 그들과 뒤섞인 현실을 당연하게 여겨왔다.


그런 나를 한이결이 거칠게 잡아끌었다.


“일어나. 나랑 갈 곳이 있어.”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상황에서 내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몸을 간신히 일으키려던 그때,


“여기 있었네요.”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구현이었다.


한이결은 나에게 고정했던 시선을 천천히 거두고 그를 돌아보았다. 정구현은 양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눈동자가 셔터를 누르듯 빠르게 몇 번 깜빡였다. 아마 지금 이 순간을 모두 기록하고 있을 터였다.


“어디로 가시려고요?”


정구현의 말투에는 명백한 도전의 기색이 서려있었다.


“반기계는 갈 수 없는 곳이야.”


한이결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그녀의 말에 정구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 주먹을 단단히 쥐었다. 싸늘한 공기 속 둘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그때, 한이결의 손에 들린 폴더폰에서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이결이 화면을 확인하고는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쯧, 아쉽네.”


그녀는 줄곧 붙잡고 있던 내 손목을 놓으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네가 지금 느끼고 있는 그 감정, 쉽게 사라지지 않아.”

“... 그게 무슨 소리죠?”


내 말에 한이결은 짧게 코웃음을 쳤다.


“시간이 지나도, 흐려지진 않을 거야. 그 시스템 안에 전부 저장되고 있으니까.”


그녀는 폴더폰을 접으며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헤이트. 감정쓰레기통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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