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아이

by 카폐인

헤이트.

평소엔 흘려듣던 단어였다. 하지만 지난번 지선의 폐기 로그에서 처음 '헤이트의 파편'이란 말을 보았고, 이제는 H보관소 소장 한이결의 입에서도 직접 듣게 되다니.


해당 모델 알고리즘- 전부 폐기된 감정.
열람 불가.


삐빅. 짧은 전자음이 울리고, 바코드 스캐너에 떠 있던 창은 사라졌다. 그토록 사랑을 갈구하던 지선의 기록. 감정의 조각이 하나라도 남아 있을까 기대했지만,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네가 있는 곳은 감정 정비소가 아니야. 사람의 영혼을 빨아들이는 곳이지.’


그녀가 떠나며 남긴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숙이자, 소파가 털썩하고 꺼졌다. 옆을 돌아보니, 시무룩한 얼굴의 홍초빈이 앉아 있었다.


“정구현 씨는요?”

“아까 같이 대표 만나고 다른 모델 수리한다고 갔어. 왜?”


초빈이 힘없이 축 처진 어깨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소유하 대표… 확실히 Z세대더라고요.”

“아, 그 젠…”

“아뇨, 지랄할 때 그 지랄이요.”


나는 피식 웃었다. 초빈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더니 스마트폰 화면을 내 앞으로 쑥 내밀었다.


화면 위쪽에는 ['엄마의 빈자리, 이제는 휴머노이드가 대신해요']라는 큼지막한 제목이 떠 있었다. 그 아래, 모자이크 처리된 초빈으로 보이는 실루엣이 작게 실려 있었다.


"김지선, 그 휴머노이드를 H보관소에 먼저 뺏긴 거에 대해서 난리를 치더니, 갑자기 나보고 인터뷰하라고 하더라고요. 소승우 씨도 언제 왔는지 책상 위에 카메라부터 들이밀길래 진짜 어이가 없었어요. 그런데 옆에서 그…"


초빈은 투신 소동 이후로 여전히 휴머노이드 P-56W를 '엄마'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는지 말을 흐렸다.

"어쨌든 옆에서 '초빈아, 네가 신문에 나온다니 정말 자랑스러워.' 하면서 딸기 주스를 따라 주는데, 뭐 제가 별 수 있겠어요. 그 순간만큼은 진짜 엄마였는 걸요."


그래서 인터뷰에 응했다며 초빈은 허탈한 듯 덧붙였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소유하 대표의 진짜 의도가 우리를 위하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정구현과 내가 한이결을 만난 영상을 보여줬을 때, 그녀는 심드렁하게 손톱만 만지작거리며 "아, 그래요? 음... 아참, 나 네일 예약 있어서요. 먼저 갈게요." 하고는 정말 퇴근해 버렸다.


"대표는 회사를 위해서라면 뭐든 홍보할 거라 생각하나 봐요."

"뭐, 이렇게라도 P-54W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한 번씩 확인할 수 있으니까 나쁜 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초빈의 종알거림을 배경음악 삼아 나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헤이트'. 오늘 들어온 정보 중 가장 선명히 남은 단어였다. 누군가는 누적된 감정의 잔여물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무시되거나 버려진 감정의 응고체라고 했다. 어쩌면 한이결 말대로 단순히 '감정 쓰레기통'일지도 모른다. 실체 없이 소문만 무성한 그것.


생각의 바다에 한없이 잠기던 그때, 천장에 설치된 스피커가 자줏빛을 뿜어냈다. 곧이어 스피커에서는 승우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거기 누구라도 있으면 당장 홀로 나와주세요!


그의 다급한 외침에 나와 홍초빈은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튀어나갔다.


형광등 불빛 아래, 홀 중앙에는 작고 마른 실루엣이 서 있었다.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뛰어왔는지 아이의 입이 일정한 간격으로 벌어지며,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책가방 끈을 불안하게 꽉 쥔 채 왼쪽 손목에 스마트워치를 차고 있었다. 왼쪽 손목에는 자주색 테두리에 하트 모양이 새겨진 스마트워치를 착용하고 있었다. 워치 표면에서 깜빡이는 숫자가 마치 심장 박동을 대신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분명 우리 회사 제품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다가가 아이 앞에서 무릎을 굽혀 눈을 맞췄다. 그리고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안녕? 여기엔 무슨 일로 왔니?"


그러자 소년은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리해 주세요."

"응?"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살짝 갸웃하자 아이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순간 나는 소년의 눈 속에서 빠르게 회전하는 연녹색 나선을 보았다. 홍초빈이 인기척 없이 다가와 내 귓가에 조심스레 속삭였다.


"아무래도 저희 모델인 것 같은데요."


소년은 불안한 눈빛으로 티셔츠를 살짝 내려 쇄골을 드러냈다. 거기엔 다섯 칸 중 겨우 한 칸만 희미한 자주색 빛을 내고 있었다.


칸 밑에는 작은 글씨로 ‘P.A.T.’라는 단어가 희미하게 보였다. 나와 초빈이 굳은 얼굴로 그것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아이의 입꼬리가 힘없이 늘어졌다.


"제 몸 어딘가가 고장이 났어요.”


아이는 일정한 간격으로 울먹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부모님을 싫어하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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