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추위가 막 시작되던 초겨울이었다. 외양간의 소가 훅하고 콧바람을 내쉴 때마다 반들거리는 콧등 위로 하얗게 콧김이 서리곤 했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집집마다 굴뚝으로 연회색 연기가 몽실몽실 솟아오르면 고만고만한 아이들은 숨이 차도록 골목을 뛰어다니며 놀다가도 앞다퉈 집으로 돌아간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종일토록 노는 것이 일과였던 나는 일찌감치 저녁 밥상을 물린 할아버지 곁에 누워 살포시 잠이 들던 참이었다. 설거지를 끝내고 뒷정리를 하던 할머니가 불이야 불이야 외치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누워 계시던 할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장지문을 열어젖히며 마루를 지나 마당으로 향했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는 채 덩달아 따라 나간 나는 마당 한가운데 서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할머니는 우물에서 양동이에 물을 가득 퍼 담아 들고 외양간 쪽으로 뛰어가며 다시 한번 불이야 소리쳤다. 얼른 그쪽으로 가 보니 볏짚을 쌓아놓은 외양간 한쪽에서 불길이 솟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연신 물을 길어 나르고 앞뒷집 사람들도 앞다퉈 양동이에 물을 담아 불길에 뿌려댔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행히 불길이 잡혔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불이 났던 자리를 보니 한쪽이 거의 다 타서 흉물스럽게 변해있었다.
잔불까지 확인한 후 한달음에 옆집으로 달려간 할머니는 목청 높여 옆집 언니 이름을 부르며 빨리 나오라고 외쳤다. 아무런 기척이 없자 할머니는 네가 우리 집에 불을 내는 걸 다 봤다며 다시 이름을 불렀다. 잠시 뒤 방문이 벌컥 열리고 아저씨와 아줌마가 튀어나왔다. 다짜고짜 어디서 생사람 잡느냐고 따졌다. 할머니는 개숫물 버리러 나갈 때 외양간 쪽에서 후다닥 뛰어간 사람이 이 집 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곧바로 언니가 따라 나오며 그 사람이 나라는 증거가 있느냐고 맞받아 소리를 질렀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옆집 사람들이 한데 엉켜 고성이 오갈 무렵 동네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들었다.
한바탕 소란스러움이 지나도록 분이 안 풀린 할머니가 경찰서에 신고했다. 얼마 후 경찰관 두 명이 도착해 불이 난 곳을 찬찬히 살피더니 주변에 떨어져 있는 성냥개비와 반쯤 타다 남은 성냥개비를 주워 물증을 확보하고 발자국을 살피기도 했다. 경찰관은 몇 번씩 옆집을 오가며 현장 검증을 끝낸 뒤 내일 다시 오겠다며 돌아갔다.
다음날 점심 무렵 어제 왔던 경찰관 두 명이 다시 왔다. 오자마자 옆집 언니를 불러 한참을 이야기하더니 그중 한 명이 내가 있는 안방으로 들어와 엎드린 채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잠시 뒤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부스럭거리며 입으로 가져갔다. 제복 입은 경찰관이 우리 집 안방에 들어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했기에 일거수일투족을 카메라 앵글 잡듯이 지켜보았다. 엎드려 서류를 작성하는 경찰관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그 무엇이 못내 궁금해 조금씩 옆으로 다가갔다. 그것은 바로 보름달 카스테라였다.
보름달처럼 동그랗고 뽀얀 빵 안에 새하얀 크림이 가득 들어있는 카스테라를 아저씨가 베어 물 때마다 점점 작아져 반달이 되어갔다. 흰 크림이 묻은 아저씨의 입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이 나도 모르게 입안에 침이 한가득 고였다. 코앞에서 뚫어지게 쳐다보는 내 시선을 모른 척하기엔 부담스러웠는지 경찰관은 빵을 한 조각 떼어 내게 주었다. 난 그 빵을 받아 들고 얼른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할머니는 내 손에 들린 빵을 보더니 있는 힘껏 꿀밤을 때렸다. 그리곤 경찰관에게 연신 죄송하다며 굽실거렸다. 쥐어 박힌 꿀밤 자리가 너무 아팠던 나는 눈물을 찔끔 짜내면서도 빵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 맛은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부드럽고 달콤한 꿀맛이었다.
그때 범인으로 지목됐던 그 언니는 나중에 자신이 그랬노라 자백을 했단다. 왜 그런 일을 벌였는지 어른들의 이야기라 자세히 모르나 옆집과 자주 다툼이 일어나곤 했다. 옆집 언니는 그 뒤로도 경찰서에 여러 차례 불려 가 조사를 받고 구치소까지 갔다. 그러나 이웃 간의 일이라 옆집 아저씨의 간곡한 청으로 합의를 보고 풀려나왔다. 이후 옆집은 겨울이 채 지나기도 전에 조용히 이사 갔다.
요즘은 빵이 흔하다. 그것도 종류가 다양하여 취향대로 고를 수 있다. 가끔 아이들 간식거리를 사기 위해 빵 가게에 가지만 내 입맛에 맞는 빵을 고르긴 쉽지 않다. 가끔 가는 동네 슈퍼 빵 진열대엔 지금도 보름달 카스테라가 놓여있다. 반가운 마음에 사 들고 와 한입 베어 물면 그날 그 경찰관의 멋쩍어하는 표정이 보름달처럼 떠오른다. 그때의 그 한입처럼 입안에서 살살 녹진 않더라도 추억의 맛을 떠올리기엔 제격이다. 어린 시절의 짧은 단상은 무덤덤하고 무심한 날들에 생기가 돋는 특효약이 될 때가 있다. 달콤한 크림 가득 묻히며 보름달 카스테라를 한입 베어 문다. 입맛은 달콤하고 마음은 말랑해진다. 그리움이 새순처럼 피어나는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