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순간도 정체되어 있지 않은 유일한 분야는 어쩌면 디자인이 아닐까. 시대별 국가별 정서와 세대별 그리고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디자인은 계속 변화했고 또 빠른 듯 느리게 그러나 높은 밀도를 드러내며 변화해왔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유행은 실시간으로 바뀐다. 현재의 것은 곧 낡은 것이 되고, 익숙한 것은 금방 지루해져 버리는 시대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순수 자연이 아닌 모든 것들은 '디자인된 것'이기에 디자인은 우리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 이제는 물과 공기와 동급이라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만 같다.
한때 국가별 디자인 모음집을 도서관에서 자주 대출했었다. 그렇다 해도 대부분 유럽에 위치한 국가가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마다 디자인의 콘셉트 느낌 스타일 지향하는 목적성까지 닮은 듯 다른 모습이 제법 재밌었다. 그중에서 늘 빠지지 않고 중심이라는 표현이 적당한 것은 아니지만, 늘 화제의 중심에 놓인 국가는 바로 독일이었다. 간결한 맛. 군더더기 없이 매끈하게 처리된 면. 전하고자 하는 목적성이 고스란히 디자인에 담긴 형태야말로 심플한 것이 최고라는 어느 아티스트의 말을 떠올리게 했다.
이번에 읽은 책은 제목에 디자인이란 단어를 언급하였으나 읽다 보니 베를린이라는 도시에 대한 해박한 여행기를 담고 있었다. 물론 베를린에 위치한 여러 공간과 시설에 대한 디자인 관련 코멘트도 적지 않았으나, 저자가 바라본 베를린의 정서와 공기, 그리고 그곳만이 갖고 있는 특징들이 세밀하게 잘 드러났다.
그리 장황하지 않은 설명은 간략하고 집약적이다. 반드시 전할 말만 전한 것 같아 가독성이 높다. 적절한 수준을 넘어 풍족하게 볼 수 있는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은 이 책의 가장 빛나는 보석과도 같다. 하물며 수직과 수평을 세밀하게 크롭 해서 다룬 흔적이 보여 더없이 좋다. 구도와 흐름이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 같은 공간이지만 중요도가 높은 주제는 여러 장의 사진으로 빼곡하게 채운다. 책 한 권으로 베를린 구경 다했다고 스리슬쩍 거짓말하고 싶을 정도다.
넘쳐나는 도서관과 전시장, 그리고 오래된 건축물과 독일만이 갖고 있는 근 현대사의 아픈 흔적들은 베를린을 채우는 또 하나의 키워드다. 부산스럽지 않아 좋다. 어쩌면 그들의 삶의 방식 그리고 소통하고 이해하는 성향이 시멘트로 만든 건축물에도 스며들어 있다. 여러 형태의 서점들 또한 도시를 배부르게 만들어 준다. 새로운 콘텐츠로 달라지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오래되고 익숙한, 무엇보다 필요한 것들을 지키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입장에서 그들은 그 빠른 시대의 흐름 속에 미온적이게나마 제대로 된 저항을 이룬 것만 같아 보인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만 정확하게 전달하는 간결한 전광판. 도시 전체를 촘촘한 거미줄처럼 연결 짓는 버스와 트램만이 갖고 있는 노란색이 갖는 아이덴티티는 사뭇 귀여움마저 느끼게 만든다. 당장 국내 도입이 시급한 빨기 모양의 판매부스는 그 어떤 미사여구도 부족할 것이 없는 상징처럼 느껴진다. 더욱이 위치해있는 공간과 지역적 특성의 배경을 디자인으로 업그레이드한 쓰레기통까지... 이방인의 시선으로만 볼 수밖에 없으나, 책 한 권을 통해 바라본 그곳의 풍경은 매력적이다.
여행을 테마로 하는 범람하는 책들 가운데, 디자인이란 이름표를 달았으나 결코 앞선 주제들에 못지않은 즐거움을 이 책이 선사한다. 이번에도 책 한 권으로 여행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