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잭 슈렉 Apr 20. 2024

좋은 음악은 누군가의 미래를 바꿔 놓을 수도 있다.

'한 편의 비디오, 사람의 미래를 바꿔 놓을 수 있습니다'


대여점에서 빌려온 비디오를 플레이어에 넣으면 반드시 볼 수밖에 없는 경고에 가까운 이 문구는 동시대를 지내온 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한 편의 영화, 한 권의 책, 한 장의 앨범이 누군가의 미래를 바꿔 놓을 수도 있다는 말...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들이 지금도 내게 작용하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다. 찬란하게 빛났던 그때의 순간들이 가끔씩 떠오른다. 


중학교 동창 Y는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찾았다. 여차저차 팬클럽을 준비하고 있는데 컴퓨터 잘하니까 회지 하나 만들어 달라 했다. 음악도 좋아하니까 이왕이면 같이 좋아해 보자고 권유를 한 것이다. 한창 메탈리카에 빠져 있었던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밴드 이름에서 세련미는 조금 떨어졌다. 음악은 조금 이상했으나 금방 귀에 익었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드림시어터와의 인연은 아래한글을 잘한다는 이유로 이제 막 만들어진 팬클럽의 회지를 만들어주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세 번째 시삽이 되었고 어쩌다 보니 영구 시삽이 되어버렸다. 세월이 흘러 팬클럽의 틀은 기억 속으로 사라졌지만 드림시어터를 시작으로 하는 인연의 끈은 사방팔방 지금까지도 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팬클럽에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 A는 도저히 혼자 못 가겠으니 나와 꼭 같이 가자고 떼를 부렸다. 새우잡이 배를 타는 것도 아닐 텐데 음악 감상회에 혼자 가는 게 뭐 그리 무섭냐고 반문하자 술을 사준다고 했다. 옳거니. 그녀를 따라 신림동에 오래된 LP 바를 찾았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따뜻했다. 세상에 이토록 많은 음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내게 선물해 주었다. 고등학교 시절 잠시 잠깐 들었던 라디오 프로그램의 여운이 현실 세계로 소환되었다. '전영혁의 음악세계' 애청자 모임에 그렇게 발을 들이게 되었고, 드림시어터와 마찬가지로 인연의 끈은 지금까지도 내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함께한 시간을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아티스트는 데빌돌이다. 1년에 하루 정도는 일부러 시간을 내어 그의 앨범 전체를 듣곤 한다. 


애청자 모임에서 만난 K는 내 위로 12살 많은 띠동갑 형이었다. 근무지가 종로 2가였던 덕분에 그와는 세대 차이를 뛰어넘어 매우 자주 마주했다. 연신 술을 마셨고, 숨어 있는 음악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어느 날 그의 선곡으로 펼쳐지는 음악 감상회에서 그는 나를 위한 곡을 준비했다. 듣는 순간 익숙했다. 영화 <아멜리에>의 영화음악을 담당한 얀 티에르상의 곡이었다. 심장이 요동쳤다. 내 반응에 그는 몹시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음악 감상회가 끝나고 그날 이후 그의 조언을 조금 더 얹어 '얀 티에르상'이라는 아티스트에 대해 내 관심의 영역을 확대해나갔다. 좋아하는 음악가의 모든 앨범을 한 장씩 사서 그야말로 '완벽한 디스코'를 갖추는 취미가 어쩌면 가장 의도적으로 펼쳐진 것이 얀 티에르상이었다. 10년도 훨씬 넘게 내 핸드폰 벨 소리는 그날 K가 선곡한 곡이다. 


외모는 동갑이나 나이는 역시 띠동갑인 또 다른  K는 채수영이라는 블루스 기타리스트를 내게 선물했다. 이태원에서의 저스트 블루스 마지막 공연에 나를 초대했고, 이후 압구정에서의 무대에도 그와 함께 자주 즐겼다. 간판 디자인, 신문 인터뷰를 거들었고, 약속을 지키지 못한 그의 2집까지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으나 미처 이루지 못했다. 평생 남을 부채의식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앨범을 듣고 또 듣는 일뿐이다. 


언제 봐도 늘 미남인 K는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절에 내게 고딕 메탈을 들려주었다. 장르가 막 만들어지고 가장 반짝거리며 빛났던 시기였기에 관련한 정보도 앨범도 넘칠 정도로 많았었다. 소개해 주고는 내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는지 그는 이후에 익스트림 장르를 수시로 귀띔해 주었다. 어둡고 사악하고 핏빛으로 물든 장르가 내 영혼에 고스란히 포개지는 느낌은 일종의 오르가슴과도 같을 정도로 짜릿했다. 커다란 도서관에서 숨은 책을 찾아가는 마음으로 관련된 앨범을 찾아 나서기 위한 여정은 꼬박 십여 년 가까이 이어졌다. 맑고 아름답게 빛나고 싶은 순간 가장 먼저 찾게 되는 장르가 되었다. 라크리모사와 크레이들 오브 필스를 자주 듣는다. 


안토니오 반데라스를 닮았었던 L은 뜬금없이 내게 포크 공연을 보러 가자 했다. 백 명 조금 넘게 들어갈 아주 작은 소극장에서 그날 나는 김의철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인연을 시작으로 이성원 김두수 이정선 김광석(기타리스트) 등 포크 아티스트들의 공연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모든 것은 공연을 관람한 뒤 내 가슴에 울렸던 떨림에서부터 시작됐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기반 따위 없던 그때 다짜고짜 공연 관계자에게 연락을 해서 인연을 만들어나갔다. 김의철은 내 결혼식 축가를 불러주기도 했다. 


좋은 음악을 소개하는 일은 누군가의 미래를 바꾸는 일과 같다. 고맙게도 내게 좋은 음악을 소개해 준 그들로 인해 내 인생은 많이 풍요로워지고 즐겁고 행복해졌다. 여생에 만날 아직 접해보지 않은 음악에 대한 궁금증은 수시로 날 두근거리게 만든다. 누군가에게 내가 소개해 줄 음악이 좋은 음악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은 날 설레게 한다. 막연해도 좋다. 기대한 것과 달라져도 어쩔 수 없다. 


세상에 나쁜 음악은 없으니까... 

이전 12화 냉장고의 불안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