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와 할머니와 함께 하나의 방을 썼던 어린 시절엔 '내 것'을 저장하는 보관소는 북장안이란 곳이 유일했다. 낡은 개량한옥의 우리집에서 못과 철사, 펜치와 망치를 보관하던 공구함 같은 곳이었는데 다들 그렇게 불렀다. 부짱안인지 북장한인지 종이에 써 본 적도 없기에 정확한 명칭은 지금까지도 알 수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포털에 검색을 해봐도 비슷한 말은 어디에도 없다.
아무튼 그곳은 안방과 부엌이 이어지는 벽면에 폭은 60cm 높이 80cm 깊이 20cm 정도 되는 벽에 매립된 공간이었다. 덜컹거리는 미닫이 문 2개가 어긋난 형태로 있었고, 오래되고 낡은 냄새들이 가득 풍겨오던 공간이었다. 동그란 딱지 네모난 딱지 그리고 가끔 길에서 주워온 무언가를 그곳에 보관해두었다.
네모난 딱지야 골목 몇바퀴 돌면 건질 수 있는 두꺼운 종이로 만들어 심혈을 기울인 정성까지 담아내면 완성됐다지만 동그란 딱지는 문제가 전혀 달랐다. 그만큼 모을 수도 없었고 결국 숱한 승부를 통해 따먹은 것들을 전리품처럼 그곳에 가득 채웠다. 그렇게 북장안을 가득 채우기를 5~6년에 걸쳐 몇 번 반복했을 때 쯤. 내 방이란 것이 생겼다.
처음부터 무언가를 모아야겠다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누구나 그렇듯, 한 개 한 개 모으다보니 언제부턴가 모으게 되는 그런 뻔한 그림이 만들어졌다. 그 첫번째는 책받침이었다. 만화책에 큰 흥미를 못느꼈지만, 친구들이 보는 만화 잡지에서의 드래곤볼은 분명 다른 만화와는 차원이 달랐다. 즈음하여 비디오가게에서 비디오로도 볼 수 있었으니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소장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디자인별로 달랐던 책받침은 당시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조금 얇은 건 200원, 두꺼운 책받침은 300원을 넘나들었다. 하나씩 장만하면서 방바닥에 드래곤볼 책받침을 각맞춰 진열해 놓고 볼때의 쾌감은, 분명 짜릿했다.
고추에 털이 나기도 전부터 한 사람을 몹시 흠모했었다. 첫사랑이었고 짝사랑이었다. 중학생이 되어 학교가 달라졌고, 하물며 그 아이는 제법 먼 거리의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안부를 묻고 싶었고 어떻게든 내 마음을 더 강렬하게 전하고 싶었다. 우스꽝스러운 방법이었지만 무턱대고 편지를 썼다. 그러면서 편지지 엽서를 하나씩 모으기 시작했다. 당장 쓸 것도 아니지만 나중에 쓸만한 예쁜 디자인이라면 보는 족족 사들였다. 여전히 빠듯한 용돈이었지만 다른 놀이에 비하자면 한없이 저렴한 취미였다. 훗날 모았던 엽서와 편지지가 라면상자로 서너개가 될 정도였다.
열렬한 사랑만큼이나 나를 뜨겁게 만든 것은 음악과 영화였다. 록메탈에 심취한 시절이라 악세사리에도 눈이 갔다. 해골과 뱀 피흘리는 온갖 장신구들을 너무너무 사고 싶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신분으론 도저히 시도할 수 없었던지라 스무살이 된 이후에야 열심히 사모았다. 한 손에 두세개의 반지와 너댓개의 팔찌를 치렁치렁 걸치고 다녔다. 외모는 오징어지만 손만 떼어놓고 보면 여느 락커 부럽지 않았다. 가끔은 그게 가짜인줄 알면서도 몽롱한 빛깔을 자랑하는 반지에 선뜻 몇만원을 지불하기도 했다. 내성적인 성격이었으나 반지와 팔찌를 걸칠때면 스피커를 찢고 나오는 뮤지션들과 함께 한 무대에 오르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동시에 주말마다 극장을 가면 보지 않는 영화라도 전단지를 가져왔다. 하물며 영화를 보지 않아도 충무로 종로로 이어지는 동선에 있는 극장에 문지방 닳도록 드나들며 전단지를 주워왔다. 제법 고급스런 재질의 정리가 잘 된 전단지는 한 편의 영화와 다름 없었다. 기승전결이 느껴지는 배치와 다양한 글꼴, 그리고 스틸컷들이 오밀조밀 장식했다. 그리고 돋보기는 커녕 현미경 정도는 있어야 읽을 수 있는 제작 크레딧의 아주 작은 글씨들도 나를 흥분시켰다. 막연했지만 언젠가 내 이름 석자도 저 크레딧에 등장하리라 꿈꾸기도 했었다.
좋아하는 가수의 CD를 사고, 매주 가는 극장에서 전단지를 가져왔다. 한달에 두세번 들리는 홍대에선 눈에 띄는 반지를 찾기 위한 별도의 시간도 마련했다.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방탕스런 젊음을 마음껏 낭비했다. 흔히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른다지만 나는 그때 분명 알았다. 그래서 더 격렬하게 놀고 또 놀았다.
그와중에 돈 몇푼 벌기 위해 일감을 받기 위해 지인의 사무실에 방문했다. 업무가 많아 퇴근은 고사하고 휴게실에서 매일 잔다면서 투정을 부리던 그의 책상 서랍에 아직 쓰지도 않은 칫솔 여러개를 봤다. 슈퍼마켓에 가면 천원에 하나 살 수 있는 공장에서 찍어 만든 칫솔이었다. 예뻐 보일리 만무했으나, 그날밤 머릿속에 온통 칫솔들이 떠올랐다. 그게 뭐라고! 이후 나는 칫솔을 하나씩 모았다.
내가 모은 것들도 어느 공장에서 찍어 만든것은 분명했겠지만, 슈퍼에서 흔히 보는 디자인은 감히 배제했다. 그러다보니 칫솔 하나의 가격이 제법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사서는 절대 쓰지 않고 나중에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이 생기면 그 칫솔로 고백을 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당시에도 당장 고백할 누군가는 있었지만, 그에겐 칫솔 고백은 계획하지 않았다. 이후 2~3년간 80개가 족히 넘는 나만의 아주 예쁜 칫솔들을 수집했다.
지금이야 누구나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나 전화를 이용하지만, 199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삐삐가 대세였다. PCS는 부의 상징이었고, 그래서 우린 종종 테이블에 전화기가 있는 커피숍에서 시간을 보냈다. 아주 커다란 파르페 또는 과일 쥬스를 시켜놓고 음악을 들으면서 두어시간 빌붙어도 주인 아줌마는 일절 눈치 한번 주지 않았다. 술도 마찬가지였고 담배도 일절 안했던 당시였지만 성냥개비 열댓개 들어있는 성냥갑이 내눈엔 그렇게 예뻐보였다.
커피숍, 식당, 중국집, 당구장, 노래방, 비디오방을 시작으로 성인 이후 술집을 전전하면서 성냥이 보이면 한개씩 주머니에 넣었다. 지금도 여전히 상업시설에 성냥갑을 둔다면 성냥갑을 모으는 취미는 절대 멈추지 않았을 터. 하지만 언제부턴가 성냥갑이 있던 자리를 라이터가 대신했다. 여전히 담배를 피지 않는 내게 성냥과 라이터의 차이는 전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신기하게도 라이터에는 그 매력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렇게 모은 성냥개비는 카프리 맥주 상자로 꽉 채워 1개 반 정도가 됐다.
고마운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고 아이도 태어났다. 넉넉한 형편이 아니기에 집은 넓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내 살림은 늘 애물단지가 되었다. 지금까지 총 세 번의 이사를 하면서 버린 책만 리어카로 한가득 정돈 됐을 터. 그나마 앞서 언급한 대부분의 녀석들은 부모님댁에 고이 모셔두었다. 한동안 모으는 재미를 까맣게 잊고 아내와 웃고 아이들의 똥기저귀를 갈아주며 지냈다.
그러던 즈음 대학 동기녀석이 피규어에 대단한 견해를 가진 오타쿠임을 알게 되었다. 어깨넘어 배웠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밤새는 줄 모른다고 했던가. 물론 매달 용돈받는 신세라 피규어를 많이 사모으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나름 만들어낸 방법이 1년간 용돈을 절약해 1년에 한개씩 나만의 피규어를 계획했다.
첫해에는 무리하지 않기 위해 이후 마련한 것들보다 조금 저렴한 녀석으로 목표를 정했다. 500개만 한정 판매한다는 고래 피규어였는데, 예약 후 손에 쥘때까지 꼬박 6개월이 걸렸다. 전체 길이가 70cm에 육박하는 피규어로서는 몹시 큰 스케일을 자랑했다. 고래 표면의 섬세한 질감 표현은 물론, 크기만 줄였을 뿐 고래 한마리의 모든 것을 고스란히 담은 그것은 사진보다 실물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당시 첫째아이가 2살때라 진열하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 이후 소개할 피규어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상자에 보관되어 있다.
다음해에는 욕심을 조금 내어 <다크나이트>의 배트맨과 무기고 피규어를 선택했다. 그 다음에는 생을 마감한 히스 레져의 초상권이 피규어로 제작되는 마지막 해라고 친구녀석이 귀띔해줘 조커 피규어를 마련했다. 그리고 네번째 마지막 해에는 폭스바겐 미니 버스의 우드스탁 버전을 품에 안았다. 마련하고 나서 1년에 한 두 번 부모님 댁에 가면 만져보는 가깝고도 먼 녀석들이다.
그런 여러 일들로부터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젠 모으고 수집한다고 간판을 내걸 수 있을 만한 일은 없다. 그런 일이 없을 즈음... 그러니까 큰 욕심 내서 피규어를 사던 그 때... 용돈의 일부를 어린이 단체와 지지하는 정당에 후원을 시작했다. 햇수로 10년이 되었다. 수집하거나 모으는 재미는 없으나 노동의 대가가 녹아있고, 의지가 만들어낸 후원의 의미는 세월을 가로질러 차곡차곡 적립되고 있다.
눈 앞에 보이지 않아도 모으는 재미가 있다니. 그 작은 행동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거란 소박한 희망이 나를 즐겁게 한다. 형편이 더 나아진다면 조금 더 후원하겠다. 희망의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