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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잭 슈렉 Jun 08. 2024

냉장고의 불안감

냉장고의 불안감

평범한 집. 그 안을 채우는 가전제품들은 비슷할 거다. 전기가 있어야만 작동되는 그것들은 두드러지는 외부의 충격이 없다면 제법 꽤 오래 사용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장을 일으킨다면 우린 충분히 수리가 될 때까지 기다리고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세탁기 고장은 옷장에서 최대한 옷을 꺼내 입고, 또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래 입으면 될 일이다. 평소에도 안보지만 TV는 안 보면 그만이다. 전자레인지와 가스레인지, 인덕션과 하이라이트는 서로의 빈자리를 언제든지 채워줄 수 있다. 식기세척기 대신 직접 설거지를 하면 되고, 건조기 대신 빨랫줄에 옷을 널면 그만이다. 


그.러.나.


냉장고는 분명 다른 문제다. 일반 냉장고 외에 김치냉장고가 있어 수리할 때까지 음식을 보관할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지만, 집에 냉장고가 단 한 대뿐이라면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이미 우린 적지 않은 양의 재료와 음식물을 미리미리 구입해 냉장고에 가득 쟁여두는 일상에 익숙해 있다. 더군다나 몸속에는 여전히 음식을 버리면 안 된다는 반강제적인 DNA가 깃들여져 있기에 허투루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 일이 벌어졌다. 지난 화요일. 냉장고의 컨디션이 평소 대비 20% 수준으로 떨어졌다. 고장을 직감했고 원인도 알았으나 직접 수리할 수 없는 영역. 서둘러 수리를 접수하니 목요일 오전 10시에 기사님이 방문한다 한다. 하루 반나절 정도 버티는 건 어렵지 않은 일. 그런데 정작 큰일은 기사님 방문 이후에 터졌다. 레고 조립하듯 컴프레서를 교체하면 될 줄 알았으나, 교체 후 정상 컨디션까지 냉장고를 비우고 만 하루를 있어야 한단다. 


세.상.에.나. 


부랴부랴 보냉 가방에 냉장고에 있는 음식들을 담았다. 버려도 될만한 것들을 제하고 나니 이마트 배송할 때 주는 그 커다란 가방 크기로 4개가 만들어졌다. 택시를 불렀고 걸어 5분 거리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일반 냉장고 하나 김치냉장고 둘을 보유하고 있는 엄마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음식 보관을 부탁드렸다. 그날이 현충일이라 내가 집에 있었기 망정이지, 아내 혼자 있었더라면 상황이 어땠을까... 나보다 아내가 몹시 놀란 분위기였다. 


근현대사에 있어 가장 혁명적인 발명품은 흔히 세탁기라 한다. 그로 인해 여자의 사회 진출이 두드러졌고, 무엇보다 손빨래에 드는 엄청난 시간들이 거의 전멸할 수 있었다. 하나, 허영과 풍요로움이 지배하는 오늘날에 가장 혁명적인 가전제품은 다름 아닌 냉장고라 나는 감히 본다. 칸칸이 온도와 기능 설정이 가능하고, 죽어가는 재료마저 사망선고를 늦출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지닌 냉장고야말로, 먹는 행위를 철저하게 당연시하게 만들어주는 믿음직한 도구가 맞다. 


하나 그 냉장고가 생명을 다하고 새로운 신입을 맞이하기 전까지 느낄 그 일말의 불안감은 비단 나만이 경험하는 감정은 아니었을 터. 게다가 계절마저 한여름이라면 아무리 침착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잠시 잠깐 현기증을 느끼지 않을까. 


가전제품, 생활용품 등은 결국 우리를 편하게 해주고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우리는 그런 것들로부터 지배당하고 되레 굽신거리며 살고 있다. 한 번에 빨아야 할지 나눠 빨아야 할지 세탁물의 옷감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정성껏 만든 김치도 김치냉장고에 넣어야 더 맛있어진다고 최면을 건다. 더 큰 화면이어야 하고 더 많은 기능이 있어야만 한다. 



결국 나를 편하게 해주는 것은 올곧이 나 스스로의 노력과 훈련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그것은 스마트폰이다. 온갖 편리성을 갖췄지만 오래 이용하는 사람의 창의력과 상상력 그리고 정서적 여유로움을 갉아먹는 그것이야말로 혁명적이나 보이지 않는 위험한 가시를 끝없이 지닌 꽃이다. 향기마저 없는 그 조화 앞에 모두가 굽신거린다. 


세상에 모든 스마트폰이 고장 나면 좋겠다.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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