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인이라 잠꾸러기인 아내와 이제 겨우 열 살 둘째는 아침잠이 많다. 그리하여 아침밥은 늘 첫째와 단둘이 먹는다. 전날 있었던 일들과 아침밥을 기다리며 본 여러 가지 것들을 가지고 아침 먹는 내내 귀가 따가울 정도로 질문을 쏟아붓는다. 우연히 나도 전날 본 인터넷 밈이면 대답하기 쉽지만, 초등학교 6학년의 세계에서나 존재하는 소재가 등장하면 잠시 얼음이 돼버린다. 받아치는 맛도 있고, 벙어리가 되는 맛도 달콤하다.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가능한 대화를 오래 나누는 것을 나름의 밥상 예절로 삼았다.
유난히 컨디션 좋은 어느 날. 아침 설거지를 하는데 등 뒤에서 첫째가 생뚱맞은 질문을 던졌다.
"아빠는 가장 무서운 게 뭐예요?"
질문의 의도를 간파하고는 귀신이나 유령 따윈 대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밥그릇 2개를 연달아 씻었다. 머뭇거리자 아이도 내 고민을 짐작했는지 '없으면 말 안 해도 돼요'라고 했으나 그래도 대답은 하고 싶었다.
"음... 아빠는 가장 무서운 게... 할머니.. 아빠 엄마야"
대답하고 나자 괜히 가슴이 서먹했다.
40년 넘게 살면서 단 한 번도 나를 뒤흔들 유혹 따위는 없었다. 잠시 잠깐 요샛말로 멘붕이 올 때도 있었으나 파장은 크지 않았고 삽시간에 매듭이 지어졌다. 성격 탓이려니 했다. 워낙 지지부진한 걸 싫어하는 면도 있었다. 후회할 바엔 다시 시작하고 수정하는 저돌적인 면도 있었다. 돈 몇 푼, 잠깐의 시간, 사람 한 둘의 대가는 결국 나 스스로 책임져야 할 무게라 늘 생각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어느 정도 날짜가 이어지고 나면 돌이켜봤을 때 나를 지탱해 준 가장 무거운 중심 추는 바로 엄마였다. 설령 당신은 내게 평생을 통틀어 공부 하란 소리 한 번 없이, 내게 그 무엇 하나 단 한마디의 삶의 방향성이나 조언이나 충고 또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거기엔 엄마가 있었다. 스스로도 신기해서 되새겨보고 곱씹어 봐도 마땅한 꼬집을만한 이유 하나 없지만, 그곳엔 늘 엄마가 있었다.
내게 남은 도덕성은 모두 엄마 덕분이다. 처자식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는 있지만 어쩌면 처자식 너머 더 높은 곳엔 엄마가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계획하지 않았던 셋째 자식의 출생부터가 내가 가장 고마워해야 할 첫 단추다. 그리고 나의 출생과 동시에 기울어진 시댁의 형편은 엄마를 설명하기조차 버거울 정도의 고된 노동의 현장으로 내몰았다.
내 자식이 태어나기 전, 이른바 신혼 시절 잠시 잠깐 일을 쉬며 공백이 있던 바로 그때였다. 엄마의 유방암 진단과 6개월에 걸친 항암치료와 수술을 바로 곁에서 간호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인생에 가장 큰 선물이었다. 내가 진 빚의 만 분의 일도 안되지만, 정확한 암 치료와 이후 건강을 되찾은 엄마의 모습은 거울을 볼 때마다 싱긋 웃는 내 얼굴에 고스란히 투영되었다.
나열하면 끝도 없을, 엄마 인생의 구차한 모든 것들이 앞으로 내가 더 열심히 살아나가야 할 거름이 되었다. 걷어드리고 치워드리고 매듭을 지어드려야 한다. 당신이 날 이만큼 길러주신 보답으론 몹시 약소한 다짐이다.
첫째의 질문에 그렇게 대답을 하곤 서먹거린 마음을 진정시키곤 곰곰이 생각해 봤다. 지극히 평온한 수순으로, 엄마가 나보다 먼저 돌아가시고 나면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떠올랐다. 한 번도 짐작해 보지 않은 풍경이 오래전에 본 영화처럼 장면 장면 하나씩 편집되어 머릿속에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무서운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