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도, 번역도 아닌.
그저 그런 영어실력을 가진 나로서는 외국작품을 '번역본'으로 읽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때로 어색하거나 매끄럽지 못한 문장을 만나더라도 번역본이 가지는 한계라 생각하면 너그러워 진다. 아쉬움은 있지만 절절할 만큼은 아니다.
그런데 올해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탄 덕분에 '채식주의자'의 번역본을 접하게 되었다.
나는 <채식주의자>를 통해 한강 작가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처음 그 책을 읽었을 때의 충격과 두려움은 아직도 생생하다.
힘겹게 힘겹게 페이지를 넘겼던 기억, 차마 읽어 내려가지 못했던 상황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장 하나 하나에서 느껴지던 깊고 예민한, 때로는 아름답기까지했던 감성때문에 읽기를 포기할 수는 없었던 기억.
아, 이제는 영어책이 번역본이고, 한국어책이 원서로구나, 라는 묘한 설레임으로 책장을 펼쳤다.
그러나 나는 <채식주의자> 번역본의 2-3페이지를 읽은 후, 조용히 책장을 덮었다.
함께 구입하려던 책 꾸러미에서 책을 빼고, 서점 매대 위에 조심스레 다시 올려 놓았다.
분명 같은 내용이었음에도 <채식주의자>와는 달리 <The Vegitarian>에서 느껴지는 밋밋함이란...
같은 문장을 그대로 번역했음에도 왜 한글로 읽었을 때의 깊고 예리했던 그녀 특유의 감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걸까?...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일 뿐이며, 노벨상을 받게 해 준 번역가에게는 진심 감사한 마음이다)
나는 내 짧은 영어실력으로 문장 해석이나 가능할까? 라는 민망한 질문으로 시작했건만 '느낌이 없어 실망'이라는 마음의 소리때문에 당황스러웠다.
'번역본이니까 이 정도 어색함은 당연하지' 라며 너그러웠던 마음이 왜 우리나라 작품을 번역한 책에서는 용납되지 않을까? 너그러움은 커녕, 나는 실망과 안타까움으로 더 이상 읽고 싶은 마음마저 사라져 버렸다.
그 때 였던것 같다.
원서, 를 읽는 것은 단지 '오리지널'을 소유하고 '오리지널'을 읽는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원서를 읽는다는 것은 그 작품의 '영혼'을 만나는 일이겠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한때는 번역가의 진정성을 의심하기도 했었다.
번역가? 참 애매하지 않은가? 작가라 할 수도 없는데, 작가의 흉내를 내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것 같다.
단순한 해석이, 원서의 스토리텔링이 되지 않기 위해서 번역가들이 얼마나 고분분투하겠는지를.
그래서 번역은 동시통역 이상의 것이 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제대로 잘 번역된 작품에 대해서 작가뿐만 아니라, 번역가에게도 충분히 감사해야 할 일인 것이다.
감사하게도 최근 이런 원서 읽기의 기쁨을 알게된 기회가 있었다.
김남주 리더님이 이끌어 주시는 NTB 원서 읽기 모임에서 <The Eyes and The Impossible> 책을 읽게 된 것이다.
<The Eyes and The Impossible>를 읽으면서도 내내 마찬가지의 생각을 했다.
종종 리더님과 읽기 맴버들이 참고로 올려주시는 한글본을 읽을 때면, 솔직히 속이 후련했다. 의미 또한 단박에 이해되기 때문에 편하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왠지 영어 문장 읽을 때의 감칠맛이 느껴지지 않는, 밋밋함이 컸다는 점이다.
원서 읽기가 느리고 답답했지만, 그럼에도 굳이 한글책을 보지 않으려 했던 이유였다.
어느 날은 문득 이런 차이를 느낄 수 있는 내가 참 좋아지기도 했다.
함께 나눌 수 있는, 기가 막히게 훌륭한 멤버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는 점 또한 좋았다.
혼자 읽었다면, 해석하기에 급급하며 읽었을 것이 틀림없었는데, 함께 읽으니, 해석이 아닌 텍스트에 담긴 마음과 영혼을 읽으려 노력했던것 같다.
'번역본으로 읽는 것이 당연하지' 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원서로 읽고 싶다'라며 변덕을 부린다.
꾸준히 읽다보면 원서에 담긴 텍스트의 맛을 더 잘 느끼게 될까?
이런 생각이 그냥 한번 해 보는 질문인지, 실은 내 마음의 소망인지 생각해 본다.
1년후에도 여전히 원서 읽는 기쁨을 깨닫고 있다면, 소망이 싹을 틔운 것이겠지..
완독을 하고 수료증을 받은 오늘, 나는 일단 자세를 잡아본다.
영어 원서도 한글책도 마찬가지.
보이는 텍스트만 읽지 말고, 문장이 품고 있는 텍스트의 영혼도 읽어 볼 것.
조급함때문에 속독하지 말고, 정독하며 생각을 발효시킬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