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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는 받고 싶지만, 사람은 만나기 싫어서

모순

by 소리


그냥 조용히 마음을 놓아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누군가를 만나 조근조근 힘든 마음을 털어놓고 위로받는 것도 좋지만, 이 마저도 힘이 부칠 때가...

위로는 받고 싶은데, 사람은 만나기 싫다.


이런 모순덩어리인 생각이 들 때마다, 몇 년 전인가 이효리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유명하지만 조용히 살고 싶고, 조용히 살지만 잊혀지긴 싫죠."

그녀도 비슷한 심정이었을까.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하며 살았을까, 그저 안고 살았을까...




이럴 땐 할 수 없이 내 안에서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걷기'이다. 가능한 낯선 곳을 걷는다.

멀리 시청이나 북촌, 안국동 혹은 자주 찾지 않았던 공원 등이다.


걷는 동안 내 속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나는 정확하게 그 메커니즘을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걸으면서 마음에 활력을 얻고 새로운 다짐을 한다는 건 거짓말에 가깝다.

그저 끊임없이 펼쳐지는 '낯 섬' 자체를 보면서 내 안의 슬픔이나 공허함을 잊는다고 해야 할까.

흘려보낸다고 해야 할까,

버린다고 해야 할까.


이렇게 되돌아온 자리는 여전히 힘들지만 걷기 전보다는 견딜만하기에 그렇게 또 그 시간을 넘기며 근근히 살게 된다.


그런데 이 속절없는 방법에 한 가지 대안을 발견했고, 그것이 어느 정도 아니 꽤 많은 효과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세상을 버릴 정도는 아니어도 '마음에 휴식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내 안의 울림이 들린다. 그럴 때 컴퓨터 한 구석에 숨겨 놓은 곱디고운 정물화들을 꺼내본다. 움직이지 않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림 속 물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 마음이 안온해진다.
(....)
인물이 등장하는 그림은 함께 슬퍼하고 행복해하느라 감정이 더욱 소비되기도 하니까.
'나는 오늘 마음이 피곤하니 네 마음은 나에게 전달하지 말고, 내 마음만 네가 온전히 받아주면 참 좋겠다'하는 날에는 정물화가 제일 좋은 짝이다.

<하루 한 장 인생그림>, 이소영


'아, 그렇지' 하며 나는 정물화를 그릴 때 느꼈던 평안하고 안정되었던 마음을 기억해 낸다.

인물화나 풍경화를 그릴 때의 긴장감과는 달리 눈앞의 정물들은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기에 그 앞에서는 내 감정 또한 소모될 필요가 없다.






내가 가진 몇 가지 정물화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세잔의 사과, 르누아르의 꽃다발....

생각도 언어도 필요 없이 그저 감정만을 그쪽으로 흘려보내 본다. 말없이 잔잔하게, 하지만 굳건히 자리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 정물들은 아무리 내 감정을 쏟아부어도 끄떡없을 것만 같다.


몬드리안의 네모, 네모..그림, '참 재미없네, 차갑네, 쌀쌀맞고 냉정하네.....'라고 느꼈던 그림들도 다시 보인다.





감정에 흔들릴 때마다 몬드리안의 기하학적 추상화를 보는 이유는 그가 추상을 그린 이유화 흡사하다. 몬드리안의 추상화는 머뭇거리거나 우와좌왕하는 법이 없다. 어떤 색인지, 어떤 형태인지, 즉흥적이지 않게 그리드(Grid)에 의해 계획되고 기획되어 그려졌다.
(...)
회화가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가장 본질적인 질서에 도달해야 한다고 믿었기에 수직과 수평선, 그리고 빨강, 파랑, 노랑, 검정, 하양으로만 작업을 완성했다.

"균형은 곧 행복을 의미한다"
몬드리안에게 수직선은 의지의 상징이었고 수평선은 휴식을 의미했다.


머뭇거리거나 우왕좌왕하는 법이 없는 그림.

마음이 마구 헝클어지고 복잡한 마음이 한가득일 때, 그의 그림이 위로가 되는 이유이다. 배경조차 없는 그림, 수직과 수평 선들이 주는 균형감을 헝클어진 마음 사이로 끼워 넣으면서 조금씩 마음의 무게중심을 잡아나간다. 균형이 곧 행복이라 말하며 그림은 나에게 조금씩 위로를 건넨다.


사람이 없으면 어떠할까.

조용히 나를 바라보기만 해 주는 정물화, 우왕좌왕 않는 몬드리안의 그림이 있어 나는 내 감정을 죄다 쏟아내어도 부끄럽지가 않다. 뒤돌아보면 영락없이 밀려드는 후회와 이불 킥할 일도 절대, 절대 없으니 속이 다 후련하고 든든하다.




♣ 북(Book) 노트




- <하루 한정 인생 그림>, 이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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