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 따위가 아니라,
아직까지도 엄마는 가끔씩 반찬이며 먹거리를 챙겨 와 주신다.
어설프긴 해도 이제 나름 살림꾼인데, 그런 엄마 앞에선 다시 신입으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그런데 작은 것이라도 그냥 주시는 법이 없다. 크든 작든 이름이 적힌 메모가 붙어있다.
불고기, 열무김치, 멸치, 고춧가루(날짜), 유자소스 등등 딱 보면 무엇인지 알 수 있건만 굳이...
아직도 나를 시금치, 취나물 구분 못하던 철부지 새댁으로 생각하시는 걸까.
내용물만 쏙 빼낸 비닐들을 버릴 때면 엄마의 메모도 함께 버려진다.
그런데 어느 날 무슨 생각인지 그 메모 하나를 떼어다 수첩 사이에 끼워 놓았는데, 그것이 나에게 '약'이 될 줄이야....
<혼불>에서 효원이라는 등장인물은 외로운 시댁에서 친정 부모님이 보낸 편지를 받는다. 아버지의 서신에 손을 대고 글씨를 만져보는 장면이 나온다.
효원은 아버지 하담의 편지를 손에 들고 글씨를 가만히 만져 본다. 글씨에서 아버지의 체온이 묻어난다. 가늘고 선명한 주색 붉은 줄이 세로 그어진 편찰지 칸에 잉크를 찍어 쓴 글씨였으나, 서법과 필체가 여전히 예 같고 역력해, 마치 아버지의 숨결을 마시는 것만 같다.
<혼불> 2권, 최명희
효원처럼 나 또한 언제부터인가 엄마의 이 작은 메모를 보면서 글자 하나하나를 손 끝으로 만져보곤 한다.
'파김치'에 묻어있는 엄마의 손길과 마음이 손 끝을 타고 들어온다.
엄마가 지금의 나보다 적은 나이, TV의 요리 프로그램을 보면서 적으셨다던 레시피 노트를 버린다 하셨을 때, 나는 냉큼 그것을 챙겨 왔다. 아마도 '파김치' 메모를 남겨두지 않았다면 이 노트도 재활용으로 버려졌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의 손글씨가 가득 담긴 노트를 보는 순간, 나는 이것이 어떤 보약보다 귀하게 쓰일 것을 알 수 있었다.
손글씨에는 이상한 힘이 있다.
누군가의 손글씨를 보면 어떤 모습으로든 마음이 움직인다. 다정하게, 따뜻하게, 때로는 뭉클하게.
엄마의 손글씨는 마음의 약이 된다.
다 손 놓아버리고 싶을 때, 그냥 아무렇게나 살면 어때,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하는 무력감이 또다시 침범할 때면 엄마의 메모를 찾고, 노트를 펼친다.
눈으로 글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글자를 '만져본다'.
텍스트가 아니라, 엄마의 마음이 읽히는 것만 같다.
<혼불>의 효원이 아버지의 숨결을 마시듯, 나는 엄마의 문장을 삼킨다.
그 손글씨를 짚어나가다 보면, 나쁜 마음을 품을 수가 없다. 비뚤어진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나한테 주신 인생, 막살면 안 되지.. 이렇게 힘을 내 보게 된다.
엄마의 손글씨를 더 수집했어야 했는데... 엄마의 단단하던 손끝이 속절없이 무뎌진 지금에야 그 사실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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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의(혹은 아빠의) 손글씨를 가지고 계신가요? 아주 귀한 약이 됩니다.^^--- 북소리 생각
이 나이에 머지않아 증손자 볼 나이에도
지치거나 상처받아 잠 못 이루는 밤이면
이불속에서 몸을 태아처럼 작고 불쌍하게 오그리고
엄마, 엄마 나 좀 어떻게 해 달라고
서럽고도 서럽게 엄마를 찾아 훌쩍인다면
누가 믿을까나
엄마는 부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내 시름에 겨워 엄마 엄마를 연거푸 부르면서
마음이 훈훈하게 젖어오면
오그렸던 몸이 펴진다.
이 몸이 얼마나 사랑받는 몸인데
넘치게 사랑받은 기억은
아직도 나에게 젖줄이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中, 박완서
♣ 북(Book)노트
-<혼불>2, 최명희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