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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 Mar 23. 2024

촉(觸)

사랑할수록 거리두기

우연하게도 김세일이란 작가분의 조각품을 과거 기사를 통해 만났다.

 ’촉3'.


'촉'이라는 단어가 유독 신비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기사를 서둘러 읽고 싶지 않았다.  '촉'이란 단어를 되뇌이고, 느낌을 떠올리며 사진 속 작품을 꽤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촉3> 김세일


처음 보는 모양새였다.

얼굴과 몸통, 다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사람의 몸은 맞는데, 신체의 일부분이 없다. 


빰과 빰을 맞대고 있으니 서로의 온기를 느끼고 있으리라. 잔잔히, 평안하게 웃는 한 사람의 표정에서 나는 이들이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맞닿아 있는 가슴은 있으나, 두 사람의 머리는 없다. 

양 팔도, 다리의 일부도 보이지 않는다.




타인과 함께할 때 우리는,


다시 보니 이들은 따뜻한 듯 차갑고,  충만한 듯 비어있고, 행복한 듯 슬퍼 보인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전하고자 했을까?


이런 질문이 생기고 나서야 나는 뉴스 글을 읽어 본다.


'촉' 시리즈는 사람들이 다양한 자세로 서로 맞닿아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다. 
그들은 상대방과 밀접히 붙어 있지만,
 맞닿아 있지 않은 신체의 일부는 사라진 상태다. 
타인과 함께할 때 마치 우리가 자아의 일부를 포기하게 되는 것처럼.
<매일경제, 김형주 기자>



서로 맞닿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영감을 느끼는 작가의 시선이 흥미롭게 느껴진다.

맞닿아 있기에 '촉'이라는 제목을 쓴 것도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신체의 일부가 없는 것은 '타인과 함께할 때 마치 우리가 자아의 일부를 포기하게 되는 것'이란 것은 작가의 메시지일까? 기자의 개인적인 해석일까? 

아쉽게도 이것이 분명치는 않았지만, 작품에 대한 이런 낯선 해석도 마음이 끌렸다.




의.심.


모든 타인과의 관계가 그렇지는 않지만, 

상대에 대한 사랑이 크고 깊어질수록, 나 자신을 기꺼이 포기하게 되는 경우는 꽤 있다.  내 경우 특히 자식을 위한 '엄마'로 살아갈 때, 한 사람의 '아내'로, '며느리'로, '아들이나 딸'로 살아갈 때가 그랬다.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상대방을 사랑하면 할수록 나를 더 희생해야 하는 경우라니. 

때로는 내 머리를, 양팔을, 다리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마저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이다니.


이것이 정말 사랑일까?

조각을 보는 순간, 나는 내가 사랑이라 믿었던 것들이 의심스러워졌다.

머리도, 양 팔도, 다리도 온전치 못한 조각품의 모양새가 사랑에 빠진 내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일부까지도 기꺼이 내어주며 아들을, 남편을, 부모님을 사랑했지만, 

사랑에 집착할수록 나 자신의 일부가 사라지는 것 같아 두렵기도 했다.

상대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나를 잃는 상실감도 그만큼 컸다.






사랑할수록 거리두기


나는 이 작품 속 두 주인공이 이렇게 한 몸이나 되는 듯 맞닿아 있지 않고, 

조금은 떨어져 있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떨어져 있으면 상대방이 더 잘 보인다.

상대방이 자신의 일부를 잃으면서까지 나를 사랑해 주는 것이 감동스러운 일일까?

나로 인해 무언가를 상실해 버린 상대를 보는 것이 행복할까? 


오히려 나를 통해 더 온전한 모습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이

행복하고 감동스러운 일이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차라리 한 몸 되기를 간절히 바랄만큼 사랑하는 상대일수록

조금은 떨어져 있기를 바란다.


그래야 '나'도 '상대'도 서로의 모습이 온전히 보인다.

그의 아름다움도, 부족함도, 빛도, 어둠도, 영광도, 상처도 말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응원하며, 함께 성장하는 사랑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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