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생, 육군 켈로부대 상사 출신, 어쩌면 살인병기였는지 모르는 전설의 드러머, 조용필 선생도 그분을 통해 '연습은 장엄한 구도의 길이었다'는 것을 20대에 뼈저리게 익히고 배웠다 했고, 쌀알 한 알에 반야심경 283자를 조각해 기네스북에 오른 세서미각의 달인, 공연장에선 좌서라 해서 스크린에 거꾸로 글씨를 액션 페인팅해 관객을 놀라게 했고, 대한민국에서 할리데이비슨을 제일 먼저 탄 1세대 선구자!
선생님은 세서미각에 시력을 잃었고, 평생 두들긴 타악기에 소리에 귀를 잃었고, 육채 타법으로 손가락 사이사이에 낀 여섯 개 스틱에 손가락 관절을 잃었으며, 도를 얻으시려다 2004년 심장을 잃었다.
그 뒤 매년 3월 1일은 김대환 선생님을 기억하는 날이 되었고 그 내막을 아는 사람들이 20년간 자리를 지켜 어제는 민속극장 풍류에서 공연이 있었다.
첫 무대는 이광수 선생님,
조선 최고의 <비나리>와 발 밑에 와있는 봄을 맞아 모든 액살이 물러나라고 <액막이>를 하셨고, 민족음악원 멤버들과 짧은 앉은반으로 신명을 올렸다.
'아키꼬 나카지마'
우쿠렐레를 닮은 '카나디안 마리'라는 악기로 <Turn in the flower>를 노래했는데, 성대를 조여 꾹꾹 눌러 부르는 독특한 창법으로 あいはもともと近くにあるよ(사랑은 원래 가까이 있어)라며 달달한 사랑노래를 불렀다.
해금강은일 명인,
일본 궁중 음악의 인간문화재 '오쿠라 쇼노스케'가 장구를 닮은 '츠즈미'로 생과 사의 합주인 양 심오한 연주를 하였는데, 해금은 낮은 곳에서 위로 경계를 넘으며 이중적인 소리를 만들었지만 청각의 한계를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멈출 듯 멈추지 않고 끊어지듯 끊어지지 않았다.
최선배 선생님,
사회자가 미 8군 무대에 오르신 것이 60년 전이라 소개했다. 트럼펫이 표현한 할리데이비슨의 배기음은 서서히 시동을 걸다 순간 내달았는데 중반을 넘어 속도가 서서히 줄어들며 마치 어두운 밤 숲 길을 지나 달빛이 머무는 강가에서 밤하늘을 향해 소리를 올리는 듯하였고, 끝에선 감미로운 연주가 귀를 편안하게 하였다.
색소포니스트 이정식 형님과 재즈 보컬 웅산,
사실 내 앞자리 객석에 웅산 씨가 앉는 모습을 손님 입장 때부터 알았다. 워낙 유명한 분이니 모를 수가 없었는데, 관객으로 오셔서 관람을 하시나 보다 했더니 이정식 형이 연주를 시작하자 조용히 무대로 나왔고, 그러더니 진도소리 <손님풀이>를 시작했다. "손님아 손님아~ 꿈이로다 꿈이로다~ 꿈에 살고 꿈에 죽고~ 모두가 꿈이로다~~~" 정말 놀라웠다. 재즈 보컬이 민요를 들려주리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허를 찌른 손님풀이는 '무가의 스켓'으로 변신해 알토색소폰 선율 위에서 노닐었으며, 색소폰은 <희망가>로 끝을 찍었다.
'요코자와 가즈야'
피리는 높은 곳을 오르려는 닌자처럼 조용히 다가와 높은 소리를 토해냈고, 나중엔 독침을 뿜어내는 거미처럼 돌피리를 꺼내 호흡을 뿌렸다.
거문고의 허윤정 명인,
사회자가 "누에의 꿈이 어쩌면 명인이 연주하는 거문고 줄일지 모른다"는 농담을 끝내자 비행기가 시동을 거는 듯 낮고 작은 소리로 출발해 술대와 활이 번갈아 줄을 탔다. "후다닥둥당,후다닥둥당~" 가야금의 음역과 거문고의 중후함 사이 경계를 넘나들 때 동포 2세 민영치가 장구를 매고 등장했고 오쿠라 쇼노스케의 '츠츠미'가 다시 또 등장해 두나라 사이의 이질감을 극복하고자 하모니를 만들었다.
기타의 신 김광석,
기타가 내게 물었다. '해질 무렵 아랍의 <사막>에서 베두인과 어울려 차를 마시다 지평선에 걸려 있는 별을 본 적 있어?' '없으면 내가 소리로 알려줄 게 잘 들어 봐'라는 듯, 왼손은 현을 세차게 밀고 당기고 오른손은 트레몰로 주법으로 무수히 많은 음을 조각냈다.
핀 조명이 김대환 선생님 영정에 꽂히고, 지옥 입구를 서성이는 사오정처럼 '죽음의 춤(부토)'으로 등장한 '카가야 사나에', 표정이 구천을 떠 도는 유령처럼 일그러져 있다가 배경음악으로 <서풍부>가 흘러나오면서 하용부 선생이 등장했고, 체념과 회환이 뒤꿈치를 들어 올리자 발끝으로 서서 부토를 불렀다. 그렇게 삶과 죽음은 서로 맞붙어 웬 통 풀 냄새를 늘어놓고 "세상이 그런 것 아니겠소?"라며 갔다, 지나갔다.
장사익 선생님 등장과 다시 올라온 이정식 형님,
내가 이정식 형님을 처음 본 건 고2였으니 1985년이다. 당시 박성연 선생님이 운영하시던 대학로 '야누스 재즈 클럽'에 매달 있던 정기공연 때 이판근 선생님이 떠오르는 신인으로 소개하셨던 모습을 기억하는데, 어젠 장사익 선생님 세션으로 올라와 콜라보하였다.
"모래알 같이 많은 사람들, 하필이면 왜 당신이었나~" 라며 부른 그의 노래에는 김대환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 있었고, 기타리스트 김광석 선생님 반주에 <빛과 그림자>를 부른 뒤 형님이 제일 좋아하셨다는 <봄날은 간다>를 열창하실 땐, 세상에 없던 소리와 춤은 따뜻한 봄기운에 싹트는 새싹의 소리와 형상이 아닐까라고 하시며 예술로 한국과 일본에 다리를 놓아주신 인연에 감사한다며 <아리랑>으로 새봄을 노래하셨다.
2004년 3월 그가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 대한민국 공연예술계는 그를 보내면서 평범하지 않은 장례식을 치렀다.
연대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 다시래기가 올려져 잔칫집 못지않은 시끌벅적함이 있었고, 그때 멤버 중 돌아가신 몇 분을 제외하고 어제처럼 현역에 계신 예술가들은 단 한 차례 출연료를 받지 않았고, 또 3월 1일은 다른 어떤 공연의 섭외도 사양하고 그 자리를 지켰다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영원할 수는 없는 법, 다시 피는 꽃 들은 김대환을 기억하지 못할 듯한데 초라하게 시드는 모습보다 이쯤에서 그만하는 게 맞겠다는 장사익 선생님 판단에 김대환 선생님과 헤어진 지 20년을 헤아리며 제사처럼 모시던 공연의 막을 내렸다.
장사익 선생님이 남기신 마지막 말은 이렇다.
"아듀! 형님"
"잘 놀았습니다"
"보고 싶으면 또 놀게요"
2004년에 다시래기 받고 영면하셨으니 윤회가 진짜 있다면 작년쯤 수능을 보았을 나이인데, 지구상 어디에선가 성장하고 있을 김대환의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 우리 곁에 다시 다가와 예술의 대지에 큰 거름 되어주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