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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러나 Dec 10. 2023

퇴사 후,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

과거의 내가 건네는 부탁

대책 없는 퇴사를 하니, 돈이 떨어져 간다. 그 덕에 절약이 뭔지 알아가고 있다. 예상을 못했던 건 아니지만 설움도 온다. 이건 지극히 현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 좋은 구석이 있다. '내가 선택한' 가난이라서 그런가. 원하는 걸 찾기 위해 여러 불편을 감수하는 스스로가 기특하다. 그리고 어차피 나를 찾는 여정에 호화는 필요 없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은 견뎌진다.


그런데 방구석을 벗어나면 묘한 감정이 찾아온다.


연말에 친구들과 비싼 밥과 술을 먹을 때

개업한 친구의 가게에서 마냥 기쁘게 돈을 쓸 수는 없을 때

평소에 지나치지 않고 늘 들리던 디저트가게에 들어가기를 망설일 때


따박따박 월급이 나오던 삶을 살았을 때는, 매일의 소비에 큰 책임을 질 필요가 없었다.  다음 달의 내가 있으니까. 그래서 소비에 정당한 이유를 붙이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런데 이제는 '이게 꼭 필요한 소비인가?'를 두 번 생각하게 된다. 이제는 다음 달의 내가 돈을 벌어오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미래의 내게 큰 짐을 지게 할 수 없으니 지금의 나를 말려야 한다. 그래서 '이런 시간을 얼마나 보낼 수 있을까. 빨리 구직을 해서 월급 받는 삶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런데 쉽게 구직을 하기에는 어딘가 탐탁지 않다.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내게 건네는 부탁 같은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때는 퇴사 며칠 후, 제주 세화해변의 한 카페에서였다. 엽서를 적으면 3개월 뒤 원하는 주소로 보내준다고 한다. 그래서 주저 없이 펜을 들었다. 엽서의 왼쪽에는 활짝 웃고 있는 얼굴을 그리고, 나머지 오른쪽에는 미래의 나에게 건네는 몇 마디를 적었다.


'퇴사하고 제주에 왔다. 4년 만에 밝은 웃음을 되찾았다. 어제는 오랜만에 웃으면서 잠에 들었다. 한 달 뒤, 아니 두 달 뒤 나는 어디에서 누구와 어떤 일을 하며 웃고 있을까. 지금은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지만 미래의 나야 조금은 힌트를 보내줬으면 좋겠어. 궁금하니까. 그렇지만 다 알려주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다 알려주면 재미없을 테니까!'

-세화해변 앞 카페 라라라에서.


 과거의 나는 '철저히 고민해서 맞는 답을 찾아가겠다'는 의지를 갖고, 그 과정도 즐겨보자는 마음을 가졌던 걸까. 이 여정 속에 가진 물음에 너무 쉽게 답하지 않기를, 그리고 그 답이 너무 싱겁지 않기를 바랐었던 것 같다.


나의 퇴사는 내면의 목소리에 꽤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과거의 내가 건네는 말에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함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이 삶이 내가 허락한 난이도였음을, 내가 결정한 방식이었음을 기억하니 마음이 달리 먹어진다.


그래서 조금 어렵게 가도, 길게 걸려도, 제대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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