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근주 Jul 24. 2024

안온한 관찰자

8. 숨겨진 책 관찰(4) - 밤의 유서

 유서를 써 본 경험이 있느냐고 물으면 내가 기억하기로는 없다. 유서를 써 봄으로써 삶에 대한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고 하는데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누군가의 죽음에 무덤덤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뭣도 몰라 그랬다고 쳐도,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마주하는 죽음에도 감정의 요동은 없었다. 갑작스레 돌아가신 분이 없어선지, 내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그러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기르던 고양이가 죽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삼촌이 돌아가시면서 나의 감정은 무덤덤함을 넘어서서 정적에 가까워졌다.

 조문을 한다는 것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슬프지 않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도 똑같은 감정을 가지는 건 아니니까. '죽은 당사자'에 대해 딱히 표출할 감정이 없는 것이지 남은 산 자에겐 측은이나 안쓰러움, 슬픔을 공감하려는 감정은 남들과 다를 것 없이 존재한다. 죽음의 소식을 접하는 순간엔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다가도, 장례식장에 들어가 영정사진을 마주하는 그 순간 죽음의 당사자에게 들었던 감정이 모두 증발해 버린다.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믿기에, 아무것도 없는 것에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누군가는 그와 함께 했던 시간, 기억이 밀려와 어떤 감정을 발생시킨다는데, 그건 그 사람이 살아있었다 해도 똑같이 존재하는 것 아닌가. 반대로 그와 함께 하지 못했던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어떤 감정을 발생시킨 것이었다면, 나는 과연 죽은 이가 멀쩡히 계속 살아갔다면 당장에 못해본 것들을 다 하려고 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진다. 우리는 멀쩡히 살아있는 것에는 늘 '다음에'라는 변명을 쉽게 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기억으로는 초등학생 고학년 때다. 가정 형편이 어렵긴 했지만 잘 챙겨주는 친척들이 있었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원만했던 내가 처음으로 자살을 생각한 것은. 이유가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 감정의 편린들을 긁어모아보자면, 그때의 내 나름대로 뭔가 힘들었던 게 있어서 그랬던 것 같은데 그게 정말로 죽을 정도의 일이었나 싶으면 아니라고 확신한다. 관심을 끌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10대 때의 나는 주목받는 걸 상당히 꺼려했기에 그런 이유도 분명 아니었다.

 방학 때면 늘 할머니 집에 맡겨지곤 했었다. 나는 자살 시도를 그 시기로 정했다. 당시 할머니 집에는 웅크려 앉으면 머리까지 잠길 높이의 고무 바스켓이 있었는데, 물을 가득 담아 머리를 담그고 있으면 질식해 죽지 않을까 했던 게 내가 떠올린 내가 선택한 자살 방법이었다. 머리만 담그는 그런 얄팍한 행동은 당연히 죽음으로 이어질 리 없었다. 인간의 호흡은 의지만으로 죽음에 이를 때까지 참을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시시한 시도였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얼굴과 앞머리만 젖은 상태에서 할머니 방에 들어갔다가 뭘 했길래 물을 이렇게 뚝뚝 떨어뜨리면서 방으로 들어오냐고 등짝을 맞았다. 뭐라 변명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죽음은 참 신기하다. 당사자가 결여된 상태에서 당사자를 언급 감정을 토로한다. 죽은 자는 죽음으로써 모든 것을 매듭지어 버리는데, 오히려 남은 사람들이 감정의 끈 앞에서 매듭을 짓지 못해 허우적거린다. 일생에 단 한 번밖에 겪을 수 없는 죽음이라는 압도적인 경험 앞에서 나의 죽음보다 남은 사람들에 대한 근심과 걱정과 사랑을 토로하는 것은 위선이라고만 생각했다.

 <밤의 유서>는 이런 나의 생각을 단 번에 뒤집어 놓았다. 죽음을 앞두고 아무도 없는 오두막에 찾아가 유서를 남기기로 한 주인공 알버트. 유서와 함께 조용히 자신의 생을 마감하려는 그의 목적은 유서가 쓰일수록 점차 변한다. '나'의 죽음으로 끝나버린다면 그 이후엔 아무것도 없다. 나는 죽음을 맞이함과 동시에 스스로의 감정도, 타인을 통해 전달되는 감정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나의 죽음은 내가 죽음으로써 완성된다. 그 이후는 없다.

 2인칭 죽음인 '너'의 죽음이 이 책에서 하고자 하는 핵심이 담겨있다. '너'를 사랑하게 된 순간 남겨진 '나'는 고통을 선고받은 셈이 되기 때문이다.

 3인칭인 '그' 또는 '그녀'의 죽음은 감정적으로 다가가기엔 어딘가 거리감이 느껴진다. 감정이 통과되지 않는 거대한 유리벽 하나가 나와 그 사람 사이에 가로놓인 기분이다.

 내가 가까운 사람의 죽음으로부터 타인과 다른 반응을 보인 것은 '너'라고 여겼던 사람들이 실은 '그' 또는 '그녀'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왜 늘 누군가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있게 된 걸까. 나를 그렇게 귀여워해 줬던 할머니도, 내게 아버지를 대신해 늘 든든하게 곁에 있어 준 삼촌마저도 왜 나는 그들을 2인칭이 아닌 3인칭의 대상으로 마주하게 된 걸까. 모르겠다. 이것이 고통을 선고받지 않으려는 자기 방어인지, 2인칭 관계라고 여겼던 것 자체가 그저 단순히 나의 착각이었는지는.

 어쩌면 알버트처럼 유서를 써봄으로써 내게 있어 '너'에 해당하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죽음으로써 선고받은 고통을 치르게 될 사람, 혹은 '너'의 죽음으로 인해 내가 선고받은 고통을.




 개구리의 울음과 매미의 울음이 그쳤다. 여름밤의 고요 끝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유서 쓰기를 생각한다.

작가의 이전글 안온한 관찰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