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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 떠나보내기

by sother Mar 03. 2025

아파트 첫 입주 때는 멋있어 보였던 포인트벽지들이 10년이 넘으니 나이 들어 보이고 세월의 흔적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만 같아 신경이 쓰였다. 게다가 몇 년 간 아파트 측과 누수인지 결로인지를 두고 다투던 얼룩덜룩한 벽지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리모델링을 하기로 결심을 내렸다. 빈 집으로 이사하며 리모델링하는 것이 아니라 살고 있는 집을 리모델링하는 일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네 가족이 한달살이 할 집을 구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는데 집을 구하고 나니 리모델링 기간 동안 이삿짐센터 컨테이너에 보관할 짐들이 문제였다. 이사 나가는 것과 똑같이 짐을 싸고 사다리차로 짐들을 내려 리모델링 기간 동안 컨테이너에 보관하려면 짐 부피를 최대한 줄여야 했다. 큰 짐들을 버리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알고는 있지만, 정리란 것이 그렇게 체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큰 짐 안에 들어있는 자잘한 짐들이 정리가 되어야만 내 머릿속도 말끔히 정리될 것 같았다.

수납장을 열 때마다 십여 년간 이 집으로 흘러들어 온 물건들이 나를 반겼다. 정리를 하겠다고 큰 소리를 쳤지만 어디서 생긴 것인지 언제부터 저 공간에 있었는지 이력을 알 수 없는 물건들에 휩싸인 나는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버리기는 아깝지만 쓰지 않는 물건들, 앞으로 쓸 것 같지 않은 물건들이 작은 집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마법 같은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직장에서도 나의 이야기 주제는 자연스레 리모델링으로 이어졌다. 아이들의 이층 침대와 장난감 수납장을 돈 주고 버렸다는 말을 들은 직장후배들이 당근마켓에 팔지 그랬냐며 안타까워했다. 그 당시 나는 '당근마켓' 들어는 봤지만 생판 모르는 사람과 어플로 채팅하고 거래를 한다는 것에 불신이 있었다. 거래 분쟁에 대한 뉴스도 보았고, 인터넷에도 이상한 사람들과의 거래 후기와 당근마켓 정책에 대한 불만의 글이 넘쳐났다.

하지만 집안 곳곳에 잠자고 있는 물건들을 내 눈앞에서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당근마켓에 있다고 생각하니 위험해 보이지만 시도는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목숨을 걸고 밀수를 하기 위해 국경을 넘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회원가입을 하고 위치설정을 하고 사진을 찍어 올렸다. 

첫 거래 물건은 친정엄마가 주신 커피잔세트였다. 엄마가 결혼 때 선물 받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연식이 있어 보이는 잔과 잔받침은 한송이 백합이 양각으로 장식되어 있어 단정하지만 예스러운 자태를 뽐내었다. 딱 봐도 믹스커피와 찰떡궁합인 잔,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우리 식구들에게는 필요가 없는 물건이다. 결혼하고 살다 보니 양가에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끊임없이 주셨다. 만만한 엄마에게는 "엄마! 나 이런 거 안 쓰니까 주지 마!"라고 볼멘소리를 했지만 엄마는 "우리 세대는 좋은 것 생기면 다 자식 줄려고 쟁여둔 게 있어서 그러니 사돈댁에서 주시는 것도 다 '고맙습니다'하고 받아라!"라고 하시곤 했다. 부모님의 마음이 담긴 선물인 건 알겠지만 결국 부모님 댁에 쌓여있다가 위치만 옮겨 우리 집에서도 빛을 보지 못하고 상자째 보관 중인 물건들이 많았다.

이런 커피잔 세트를 누가 살까 의구심이 들었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로 저렴히 올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핸드폰에서 "당근" 소리가 났다. 사겠다는 분이 바로 온다고 한다. 당근 첫 거래의 설렘과 걱정의 감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낯선 사람을 만난다는 걱정에 혼자 나가기 무서워 부산스러운 엄마를 옆에서 신나게 관찰하던 딸과 함께 거래에 나섰다. 도착하셨다고 하여 1층에 내려가자 인자해 보이는 부부가 함께 오셨다. 주섬주섬 제가 당근 첫 거래여서 걱정했다고 말을 건네자 웃으시며 당근거래 걱정할 일 없다며 좋은 분들 많이 만날 거라고 덕담도 건네신다. 개인사정이시겠지만 그 순간 왜 이 커피잔을 구매하시는지 정말 궁금해서 나도 모르게 너무 오래된 잔인데 왜 구매하세요라고 여쭤봤다. 말씀인즉 신혼 그릇 세트를 아직도 사용하고 계시는데 전부 백합장식이 있는 같은 회사의 그릇들이란다. 커피잔만 없으셔서 너무 아쉬우셨다고 하시며 이번에 이렇게 구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두 분은 신혼 생각이 난다며 너무 좋아하셨고 옆에 있는 나도 덩달아 미소가 지어졌다.  

아름다운 첫 거래에 힘입어 리모델링 전까지 많게는 하루에 10건씩 정신없이 당근마켓에 빠져 살았다. 당근 거래를 해본 사람들은 온도가 점점 높아지는 중독적 즐거움을 잘 알 것이다. 처음 온도를 높이는 것은 쉽지 않지만 한번 올라가기 시작하면 거래 건수가 늘어날수록 즐겁다. 매일 팔 것이 없나 탐색하고 사진을 찍어 올리는 모습을 보고 당근마켓을 소개해준 후배들은 '그 정도면 발굴 수준인데요!' 라며 그렇게 팔아도 팔아도 팔 것이 계속 나오는 우리 집을 신기해했다.

당근마켓은 실로 어마어마한 시장이었고 그 덕을 톡톡히 보았다. 그냥 편하게 버릴 수도 있지만 필요한 곳으로 보내지는 물건들이 늘어날 때마다 좋은 실천을 한 것만 같아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한 편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내가 심각한 맥시멀리스트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했다. 3년 전 리모델링으로 한차례 집을 정리한 후 이제 예쁜 집에는 꼭 필요한 물건만 두고 살아야지 다짐을 했었다.

갑자기 당근 첫 거래의 추억까지 되짚어보게 된 것은 지금 또 당근마켓과 친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리모델링 후 당근마켓 이용이 줄면서 온도가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이사를 하게 되었다. 짐정리를 시작하니 리모델링 때의 다짐과는 다르게 함께 옮겨갈 필요가 없는 물건들이 많아져있다. 어쩌면 나와 물건들은 이렇게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는 반복된 리듬에 몸을 싣고 평생 함께해야 하는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속세를 떠나 산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물건과의 인연이 완전히 끊어질 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리모델링 때 정리가 어려워 남겨 두었던 물건들과 이번 이사 때는 순순히 작별을 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욕심이 줄었다고 평하고 스스로를 칭찬하고 싶다. 아직은 욕심 가득한 책과 식물, 컵들도 언젠가 당근마켓으로 새 주인을 찾아줄 날이 오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조금씩 차근차근 떠나보내다 보면 언젠가 우리 집도 나의 마음도 욕심보다는 따스한 햇살과 가벼운 공기가 텅 빈 여유 충만하게 채워줄 것이다.  


사진: UnsplashJemima Why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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