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여름의 기억

by Escaper

일본 여행이 유행하던 작년과 재작년, 나 또한 그 흐름에 올라탔다. 쥐꼬리만 한 월급을 두 달, 세 달 모아 비행기 표를 사고 숙소를 예약했다. 여행의 행운이라면, 전 여자친구이자 지금의 아내가 일본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장거리 연애 중이었고, 서로의 나라를 오가며 관계를 이어갔다.

그 시절, 여행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었다. 매번 새로운 감정들이 샘솟았고, 특히 일본을 찾을 땐 그 감정이 극에 달했다. 여러 도시를 여행했지만, 내 마음을 가장 사로잡은 도시는 단연 도쿄였다.

생일이 있는 7월, 나는 아내를 만나기 위해 여름의 도쿄로 향했다. 중학생 때의 가족 여행, 대학생 시절 친구와의 자유여행에 이어 세 번째 일본행이었다. 처음 맞이하는 일본의 여름은 내 예상보다 훨씬 강렬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턱 막히는 듯한 숨막힘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속에는 알 수 없는 차 향 같은 일본의 공기 냄새가 섞여 있었다. 무언가 마음을 가라앉히는 향. 그 낯설면서도 차분한 향 속에서 짐을 찾고, 출구로 나섰다.

그곳에, 아내가 있었다. 익숙하면서도 반가운 웃음으로 나를 맞이하는 그녀를 보며, 그동안의 거리와 시간을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었다. 가벼운 포옹을 하고, 안부를 나누며 우리는 숙소가 있는 가부키쵸로 향했다. 공항 익스프레스를 타고 지나치는 창밖엔 산, 논, 전통적인 집들이 펼쳐졌다. 맑고 깨끗한 하늘은, 한국의 뿌연 하늘과 대비되어 내 기분을 더욱 들뜨게 만들었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근처 라면집에서 시오라면을 먹었다. 짭조름한 국물, 내 입맛에 딱 맞진 않았지만 도쿄의 공기와 함께여서인지 싫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신주쿠와 시부야에서 쇼핑을 했다. 갖고 싶던 옷들을 하나씩 구경했지만, 빠듯한 예산 탓에 눈으로만 담았다. 그래도 기분은 이상하리만치 좋았다.

도쿄라는 도시는 참 묘한 매력이 있다. 밤하늘을 수놓는 반짝이는 간판들, 그 안에 적힌 한자와 히라가나, 가타카나는 하나의 예술처럼 느껴졌다. 곡선의 획 하나조차도 아름다웠다. 한국의 간판과는 또 다른 분위기, 세련되면서도 질서 있는 혼잡함이 좋았다.

누군가는 “도쿄는 서울 같아”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닮은 구석은 있지만, 도쿄는 그 나름의 질감과 정서를 가진 도시다.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 담긴 디테일이 참신하고 재미있다는 걸 알게 된다.

백화점을 둘러본 후엔 도쿄타워 근처로 향했다. 어린 시절 방문했던 곳이라 큰 기대는 없었지만, 다시 찾은 도쿄타워는 그 자체로 색달랐다. 건물들을 내려다보며, 투명 유리 위에 서서 느끼는 묘한 스릴은 어른이 된 지금이라 더 특별했다.

시바 공원으로 향하는 길엔 푸르른 나무와 풀이 무성했다. 도쿄라는 정돈된 도시와 그 푸름의 조화는 이상하게 잘 어울렸다. 깨끗한 거리와 초록빛 자연이 함께 만든 풍경은, 도시가 줄 수 있는 정서적 안정감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 여름, 도쿄는 나에게 단순한 여행지가 아닌, 관계와 감정, 기억과 도시가 맞닿은 특별한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또 다른 나를 발견했다.

도쿄에서 돌아온 뒤에도, 가끔씩 그 여름을 떠올린다. 습기 찬 공기와 시오라면의 짠맛, 저녁 무렵의 도쿄타워와 그 앞을 걸었던 우리. 그런 조각들이, 아무런 맥락 없이도 문득문득 떠오른다. 지하철 안에서, 아침 샤워를 하면서, 혹은 늦은 밤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볼 때.

기억이라는 건 꼭 다정하지도 않고, 항상 논리적이지도 않다. 마치 오래된 소설의 문장처럼 불쑥 되살아나, 그날의 냄새와 온도, 조용한 대화까지 통째로 되감아 틀어준다.

도쿄는 내게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도시다. 어딘가 모르게 미완성인 듯한 그 거리와 간판들, 조용하지만 결코 고요하지 않은 사람들의 표정. 그 안에서 나는 조금은 부정확하고 조금은 흐릿한 감정을 들키듯 품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불완전함이 좋았다.

나는 언젠가 다시 그 도시에 갈 것이다. 다시 한 번, 차 향기 섞인 공기를 들이마시고, 낮게 울리는 기차 소리를 들으며 걷고 싶다. 그곳에서 또 다른 계절의 도쿄를 만나게 된다면, 그것 역시 아주 사적인 여행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도 나는, 조용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는 지금, 도쿄라는 도시의 한 문장 속에 머물러 있다.”


Background.jpg 도쿄의 여름


keyword
작가의 이전글사랑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