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몰라도 대충 넘기다 결국 다시 하는 이 머저리 같은 습관은 아주 골칫덩어리였다. 들려오는 새소리가, 바람에 부대끼는 야자수의 사각거림이 너무 예뻐서 도착하고 한 번도 길에서 이어폰을 꽂지 않은 이 여행에서조차 이 요상한 단점을 또다시 한번 마주했다.
이를테면, 6월 8일, 동물원 옆에 걸어서 10분 거리의 발보아 공원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왼쪽으로 꺾어 열 발자국만 걸으면 오늘 또 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왜 오른쪽으로 꺾고 혼자 엉뚱한 곳을 헤매다 공원에 다 왔음에도 보지 못하고, 오늘 다시 왔을까.
(결과적으로 날씨는 오늘이 더 좋아서 이득이긴 했다!)
바보. 잘 모르면 확인해 보면 되는데. 아무나 잡고 좀 물어보지. 어제 헤맬 때 뭔가 이상하다 싶더구먼. 왜 이렇게 바보 같은지.
핑계를 조금만 대자면, 지도를 안 본 건 아닌데 내가 찾는 지명이랑 찾는 곳이랑 일치하지가 않았다. '발보아 파크'를 검색하면 뭔가 알 수 없는 숲 같은 게 내가 진짜 가고 싶은 발보아 공원 근처로 구글 맵에 찍히는데, 그곳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Museum of Us'라는 건물이 내가 찾는 발보아 공원의 입구였다.
하, 그래도 그렇지. 사람들에게 발보아 공원 검색했을 때 나오는 사진 좀 보여주면서 물어봤으면 쉽게
찾았을걸.
오늘 오후에 발보아 공원에 도착하고 핸드폰 배터리가 마르고 닳도록 영상과 사진을 찍어대면서도 '또 뭔가 아무렇게나 넘어갔다가 된통 깨졌지. 멍청이야.'라는 말이 머리에 절로 떠올랐다.
아침에도 버스 시간표를 잘 못 봐서 내일인데 오늘인 줄 알고 허둥지둥 댔고.
바보짓 행진곡이 있다면 그건 아마 날 위한 헌정곡이리.
사진과 영상을 찍느라 배터리가 1의 자리 숫자가 되고 나서 숙소에 돌아와 조금 자고, 저녁 7시쯤 미셸과 방에서 마주쳤다.
미셸은 곱슬곱슬한 밝은 갈색 머리칼이 어깨 살짝 넘어까지 있고, 앞머리만 펴져 있었다. 왼쪽 안쪽 머리만 흰 것이 눈에 띄었다. 밝은 파란 눈에 작은 키, 항아리 체형에 나긋나긋한 목소리까지 더해져 푸근함이 돋보였다.
나이는 이제 막 중년에 들어선 듯했는데, 오늘 21살짜리 아들이 있단 얘길 듣지 않았다면 더 어리게 봤을 것이다.
출장 겸 휴가를 더해 여기 호스텔은 자기 돈으로 묶고 본격적인 출장 기간엔 회사에서 지원을 받아 호텔로
갈라면서 호스텔에서 일종의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고 했다. 직업은 뭔가를 온라인으로 트레이닝 하는 것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자세한 내용은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녀는 사교적인 사람이었다.
도착 첫날, 호스텔 방에서 마주친 미셸은 상냥하고 밝고, 귀여운, 나긋나긋하고 편안한 목소리로
"Hi, I'm Michelle. What's your name?"이라고 물었다.
이름을 말해주었지만 내 이름은 영어로 발음하면 나도 못 알아듣는 발음이 되어버려 내 영어 이름을 알려주면서 "그걸로 불러도 괜찮아~"라고 했다.
하지만 미셸은 내가 씻고 잘 준비를 할 때 한 번 더 발음을 알려달라고 했다.
이응 발음과 니은 발음을 어색해하는 그녀를 위해 나는 다시 한번 천천히, 음을 끊어서 알려주었다.
오늘 저녁, 다시 숙소에서 만난 미셸은, 제법 또렷해진 발음으로 내 한국 이름을 불러주면서(!)
"너 어제 LA 간다고 하지 않았어?" 하면서 왜 여기 있어?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 버스 티켓 날짜를 다시 보니까 9일이야. 내가 착각했어."
미셸은, "어머, 하루 더 있어서 좋다. 내일 몇 시 버스야?"라고 답했다.
"내일 오전 10시 15분이야." 하니,
"급하게 나가지 않아도 되겠다."라면서 천천히 준비해서 좋겠다고 했다.
미셸은 아침, 저녁으로 "오늘은 어디 갈 거야?', "어디 다녀왔어?", "어땠어?"라고 물어봐 줬다.
내심 그녀의 관심이 싫지 않았다. 조금 더 솔직히, 반갑고 좋았다.
15시간을 넘어온 곳에서 상냥하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라니. 숙소 밖에 낯선 남자였다면 모를까, 같은 숙소의 룸메가 영어를 잘 못할 수도 있는 아시안에게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걸어주는데 나는 좋았다.
미셸은 오늘 일이 많이 없었는지 바다표범 투어를 다녀왔다고 했다. 그리고
"좀 비쌌지만, 그럴 만했어."라면서 사진과 영상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너는 어디 다녀왔어?"라고 묻길래 나도,
"포인트 로마가 오늘 첫 일정이었는데, 해안선 라인이 너무 예뻐. 내가 지금까지 본 바다 중에 제일 예뻤어. 무조건 가."라고 말했다.
여행 얘기 끝에 나는 내 고민을 털어놨다.
"일도 그만두고, 뭘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좀 그래."
그러자 미셸은, "마음에 안 들면 바꿔! 나도 지금까지 7~8개 정도 직업 바꿨어."
"어?" 7~8개라니. 직업을!
"다른 일이 하고 싶으면 준비해서 옮기면 돼. 괜찮아. 네가 A와 B 중에서 A를 선택해서 왔지만 막상 가보니까 별로일 수도 있고, 그럼 B를 준비하고 B로 바꾸면 돼. 나는 15살 때부터 일했거든? 물론, 그땐 알바였지만. 간호 보조도 해보고, 뭐도 해보고.. 뭐도 해보고.. 필요할 때마다 바꿨어. 넌 무슨 일했어?"
"이게 내 일이었어." 나는 내가 참여했던 프로젝트를 폰에서 찾아 슬쩍 보여줬다.
"멋지다." 미셸은 감탄했다.
"그래? 사실, 한국은 야근이 진짜 많은데 급여 체계가 별로야. 그래서 우리 아빠가 만날 나보고 직업 좀 바꾸래."
야근 얘기에 미셸은 급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정말? 그건 진짜 좀 별로다. 그래 바꿔. 너 젊잖아."
"우리 아빠도 젊으니까 바꾸래. 난 지난 시간이 좀 아까운데. 그리고 지난 걸 버리고 새로 시작하려면 너무 막막할 거 같아."
"일하면서 커뮤니케이션 스킬도 익혔고, 기한에 맞춰서 일도 해봤을 거고,
여러 가지 기능도 익혔을 텐데? 그게 다 도움이 돼. 인생은 위대한 여정이야. (Life is the greatest journey). 일 그만뒀다니 얼마나 좋아! 새로운 게 기다리고 있잖아."
영화와 드라마에서 셀 수 없이 들어서 이젠 들어도 상투적이라 감흥이 안 일었었는데, 왜 15시간이나 걸려서 온 곳에서 어제 처음 본 미국 아줌마에게 들으니 마음이 싱숭생숭 한지.
"괜찮겠지?"
"그럼! 그리고 넌 용감하잖아." 미셸은 어제 나에게 혼자 15시간 넘는 거리를 비행기 타고 왔냐면서 용감하댔는데 오늘도 그런 얘길 했다.
"내가? 나는, 난 원래 새로운 곳 가는 것은 별로 안 무서워해."라고 했다.
"그게 용감한 거지. 난 운전해서 다른 도시 가는 것도 가끔 좀 무서워. 그런데 넌 혼자서 16시간 동안 저 큰 캐리어를 끌고 왔잖아. 용감하지!(You're so brave!)"
문득, 예전에 종각 마이크 임팩트 사무실 제일 위에서 봤던 문구가 떠올랐다.
"우린 졸라 젊다."
미셸과 대화를 마치고 호스텔 라운지로 내려오는 계단에서 나는 아직 꽤 '객관적으로' 졸라 젊고, 용감하단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귀국해서 뭘 해야 될지 알겠다는 뜻은 아니다.
여전히 지금까지 해온 일이 나랑 맞는지는 의문이다. 새로 일을 찾는다면 또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과정이 즐거운 일을 하고 싶다. 즐겁다는 게 단순히 하하 호호 웃는 쾌락이 아니라, 잔잔한 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 일. 그런 걸 매일 느낄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호스텔의 라운지에서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끼진 못하지만) 배경 음악 삼아 글을 쓴다.
-202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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