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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엘리온 Mar 07. 2024

우리는 가족입니다

사각... 사각... 사각...

칠판에서 분필이 미끄러지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그 소리를 덮어 버리겠다는 듯이 목소리들도 더 소란스러워진다.

“너는 바보야!  바보라고 해봐!  바보라는 걸 인정해...!”     

연필을 쥔 소년의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시도 때도 없이 들리는 목소리들을 이길 재간이 없다. 선생님의 판서라도 멈추게 해야 한다. 하지만, 소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온몸에 힘을 실어 버티는 것 외에는 없다.     

끈질기게 자신을 비난하는 목소리와 분필의 소음 속에서 안간힘을 쓰고 있는 소년과 달리 교실의 풍경은 지나치게 고요하다.

다른 친구들은 이 불쾌한 소리들이 전혀 거슬리지 않는다는 듯 평온한 얼굴로 칠판을 바라보고 있다.

“교실을 뛰쳐나가!  분필 소리가 거슬리잖아! 나가서 편하게 있어!  빨리!  빨리!  빨리 뛰쳐나가란 말이야!”

“아니야!  괜찮아.  참을 수 있어”

“괜찮지 않아!  빨리 나가라고! 너도 나가고 싶잖아!”

“아니라고~!!  네가 뭔데 날 자꾸 조종하려고 해!  꺼져!!”

쓰윽... 쿵쿵쿵... 드르륵 쾅!

결국 소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교실 문을 힘껏 열어젖히고 뛰쳐나간다.     


‘따르릉~따르릉~’

“어머님, 정호 담임입니다.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학교에 한 번 나와 주셔야겠습니다.”

‘드디어...’ 

정호 엄마는 선생님의 용건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정호가 이상한 행동을 보인 것은 몇 달 전부터였다.

친구들을 만나지 않았고, 집 안에만 있으려고 했다.  어떤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가 싶더니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부모님과 정호, 그리고 정호의 형이 둘러앉은 식탁이지만, 정호에게는 또 다른 존재가 함께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등교시키려는 엄마와 실랑이를 하는 와중에 난데없이 보이는 웃음은 섬뜩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엉망이 된 시험성적은 당연한 결과였다. 

정호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지만, 외면하고 싶었다. 선생님의 연락으로 직면을 강요당하지 않았다면 더 도망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길은 막다른 골목이었다.   

  

조. 현. 병.이라고 했다. ‘정신분열증’이라고 불리던 그것!

풋!  실소가 터져 나온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들으니 어이가 없다.  돌팔이 같은 의사!

애초에 병원에 가는 것이 아니었다.  엄마가 울면서 애원하지만 않았어도 가지 않았을 텐데... 괜히 엄마가 미워지려고 한다.    

  

‘똑똑’

“정환아... 저기... 오늘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 갖고 왔어.  약 먹고 자자”

“뭐라고요?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니... 정환아... 화내지 말고... 너도 오늘 선생님 말씀 같이 들었잖아... 네가 좀 아프대... 그럼 약을...”

‘탁!’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약 봉투를 쳐버린다.  ‘조현병’이라는 진단을 내린 사람이 엄마인 것 마냥 몰아붙인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정환의 시끄러운 소리에 아버지가 달려와서 호통을 친다. 

“내가 뭐요!  내가 어때서요!  아들 정신병자 만드니까 좋아요?!”

“좋겠어?  그게 좋겠어?  인마!  그런데 요즘 네가 한 행동을...”

아버지를 똑바로 보고 있던 정환이 갑자기 다른 곳을 보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다.

지금 정환이가 상대하고 있는 사람은 엄마, 아빠 그리고 그 수를 알 수 없는 목소리들이다. 

     

정환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내 아들이 정신병일리는 없지 않은가.  공부나 친구관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서 기(氣)가 약해졌는지도 모른다.  아들에게 약을 주면서도 찝찝한 마음이 있었다.  정신과 약은 함부로 먹는 것이 아니라는데... 차라리 한의원에 가서 보약을 지어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엄마의 마음과 달리, 정환의 아버지는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먹이라고 했다.  아들의 정신질환을 받아들이라고 했다.  그렇게 쉽게 말하는 남편이 야속했다.  하지만, 정환의 아버지도 마음이 편할 리 없다.  짐작하기 어려운 세계에서 홀로 악전고투하고 있을 아들의 마음이 보이지 않아 절망스러웠다.  어쩌면, 아내에게 짐을 지운채 자신은 한 발 물러 서 있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크고 작은 문제들이 쌓여갔다.  정환의 이름을 언급하는 낯선 번호들의 연락이 더 이상 낯설지가 않았고, 엄마는 직장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졌다.  부부의 갈등은 깊어져갔고, 정환의 형은 홀로 자라 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정환의 정신병원 입원은 여섯 번째라는 기록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따르릉~따르릉~’

아들의 전화라는 것을 알지만, 통화 버튼을 누르는 것이 두렵다.  하지만, 이미 네 번의 전화를 받지 않았던 터라 계속 무시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  아들의 애타는 마음도 힘겨웠지만, 원망과 협박을 감당해 내는 것이 더욱 버거웠다.

“.. 여보세요... 정환이니?”

“씨발!  뭐 하는 거야!  전화 일부러 안 받았지?!  빨리 퇴원시켜!  아들을 이렇게 가둬 놓으니까 좋아?  나 가둬놓고 다들 무슨 작당을 벌이려고 그래?  내일 당장 퇴원 시키지 않으면 나가서 다 죽여버릴 테니깐 알아서 해!”     


고등학생이었던 소년은 이제 20대의 청년이 되어 있다.  아들이지만, 젊은 남자의 협박은 상당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입원치료는 정환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지만, 당사자는 분노했다.  스스로가 동의하지 않은 입원은 곧 퇴원으로 이어졌다.     


정환이 집을 나간 지 3일이 지나고 있었다.  가출신고는 하지 않는다.  성인은 적극적인 실종 수사 대상이 아니었으며, ‘인권’ 침해의 소지가 있어 당사자의 동의 없이는 가족에게 인계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지난 경험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다만, 정환의 이상행동이 자해나 타해의 위험이 있어 보인다고 누군가가 신고를 한다면, 행정입원이나 응급입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환은 경찰들 앞에서 고분 하게 행동하는 법을 알고 있었고, 행정기관에서는 굳이 무리한 강제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가족은 불안감을 안은 채 속수무책으로 아들의 소식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환이 없는 집안의 고요를 유지하고 싶은 속내는 그 누구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내 아들과 내 동생을 부정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들었고, 묘한 죄책감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가출 4일째 정환이 돌아왔다.  어디를 다닌 것인지 지독한 악취가 났고, 발의 곳곳에 피딱지가 굳어 있었다. 

그런 정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끝을 알 수 없는 서글픔이 밀려왔다.  궁금한 것은 많았지만, 속으로 삼킨 눈물만이 입안을 가득 메웠다. 

엉망이 된 발끝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거두며 겨우 아들에게 다가갔다.  무릎을 꿇고, 발의 상처를 어루만지던 엄마를 가만히 바라보던 정환이 갑자기 그녀의 머리에 침을 뱉었다.  옆에 있던 아버지가 아들의 뺨을 때렸고, 또다시 가정의 평화는 깨져버렸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형은 익숙한 듯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정환이 없는 집은 다시 조용하고 잠잠해졌다. 

“엄마, 죄송해요.  나 때문에 엄마가 다칠까 봐 겁이 나요.  너무 무서워요”

아들이 어느 날 밤 조용히 다가와 속삭이던 말이 귓가를 맴도는 것 같다. 

정환에 대한 복잡한 마음이 엄마를 괴롭힌다.  

아픈 아이에게 소리를 질렀고, 가족에게 위협을 가하지 못하도록 방 안에 가두었다.  정환이 그토록 싫어하는 병원에 입원을 하면, 오히려 안도했다.  한편, 이 병에 대해서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자신으로 인해 아들이 더욱 힘든 삶을 사는 것 같아 죄스러웠고, 그 고통을 지켜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무능함이 원망스러웠다.  무엇보다 ‘엄마’가 ‘아들’을 무서워하고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들을 들킬까 봐 겁이 났다.     


동생이 아프기 시작하면서 형은 더욱 빨리 성장해야 했다.  자신도 관심이 필요한 순간이 많았지만, 건강하다는 이유로 부모님의 시선 밖에 머물러야 했다.  형이 가진 문제는 동생이 가진 문제에 비하여 언제나 대수롭지 않은 취급을 받았다.  대학 합격과 장학생 선정, 군입대와 같은 굵직한 사건들이 있었지만, 정환의 소란으로 인해 그러한 것들은 쉽게 묻혀 버렸다. 


큰 아들의 심정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함에도 그 마음까지 돌볼 여력이 없었기에 미안함과 안쓰러움은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언젠가는 큰 아들에 대한 부채감을 꼭 보상해 주리라 다짐해 본다.

     

입원 이후, 정환의 증상은 점점 호전되고 있었지만, 퇴원 요구는 집요했다.  결국, 또 퇴원을 시키고 만다.     

퇴원과 동시에 정환은 약을 먹지 않았지만(가족이 강제로 약을 먹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병원에서 꾸준히 복용한 약의 효과가 남아 있어서인지 한동안은 괜찮았다.  

폭풍 전야와 같은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던 어느 날부터인가 정환은 또다시 잠을 자지 않기 시작했다.  그리고, 집안의 모든 재산을 형에게 주기 위해서 자신을 병원에 입원시킨다고 믿는 오래된 레퍼토리를 다시 읊기 시작했다.  정환은 돈을 벌어본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힘들게 벌어 놓은 돈조차 형에게 주려 한다고 믿었다.       


집 안 곳곳을 뒤졌다.  아무리 찾아도 숨겨둔 돈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병원에 입원시켜 두고 빼돌린 것이 틀림없다.  조현병이라는 이상한 병명으로 옭아매어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는 엄마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엄마의 통화 소리가 방문을 넘어 들려온다.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어 정확한 대화 내용을 들을 수는 없지만, 병원과 통화하면서 또다시 음모를 꾸민다는 확신이 들었다.  심지어 살짝살짝 웃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또 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정환은 엄마에게 달려가 무자비하게 폭행하였고, 결과는 처참했다.       


정환은 이제 정신병원이 아닌, 교도소에 감금되었다.  ‘존속살해’라는 죄명으로.

상담실에서 처음 만나던 날, 그는 상담시간의 대부분을 가족의 음모를 설명하는 것에 할애했다.  그의 이야기를 그저 들었다.    

   

상담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마침 형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혹시나 싶어서 전화를 드리는 건데, 그 인간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저한테 연락할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의 말은 아무것도 믿지 말아야 해요.  그 인간은 사람도 아닙니다.  얼마나 교활하고 잔인한지 당해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거기 직원들도 그 괴물을 조심하십시오.  선한 탈을 쓴 악마입니다.”

뭐라고 대답할 겨를도 없이 끊겨버린 전화기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정신질환자의 가족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나는 이전보다 많은 지면을 할애하려고 한다.  환자들과 함께 부대끼는 동안 그들의 가족도 늘 언저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보호자들의 고충을 수없이 듣고, 목격했음에도 ‘환자’라는 수식어를 달지 않았기에 늘 괄호 밖에 묶어 두었던 빚진 마음을 ‘지면 할애’라는 방법으로 조금이나마 갚아 보려 한다.       


서종한, 「정신분열증 가해자의 살인 전 스트레스요인과 살해수법」이라는 논문에서는 조현병 환자의 살인 중, 가족 내 살인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망상이나 환청이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거나 환자를 보호하기 위한 간호가 그들을 격분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장에서는 이런 내용을 숱하게 보고 듣는다.      


조현병으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쓴, <조현병, 낯선 자아와 떠나는 여행>에서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미치면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또 그들을 집어삼키는 소용돌이에 대해’ 알리고자 책을 썼다고 했다.  조현병이라는 것을 수년간 지켜본 나에게 그녀의 외침은 메아리가 되어 두고두고 귓가에 울려 퍼졌다. 


많은 학자들이 정신질환자의 치료 단위는 환자 한 명이 아닌, 가족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치료 프로그램이나 교육에 참여할 수 있는 가족은 많지 않다.  그 시간에 가족들은 각자의 삶의 위치에 있어야 했다.  주로 만성화의 경과를 밟는 조현병의 특성상 길고 긴 전쟁의 시간을 버티기 위해서라도 생계 현장을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2017년 문재인 정부는 ‘치매 국가책임제’를 도입했다.  문 대통령은 “치매는 다른 질환과 달리 환자 본인의 인간 존엄성도 무너지고 생존까지도 위협받을 뿐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고통받는 심각한 질환”이라고 하면서 치매 문제를 개별 가정 차원이 아닌 국가 돌봄 차원으로 해결하겠다고 했다.

문장 첫머리의 ‘치매’라는 단어를 ‘정신질환’으로 바꾸어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크레플린(Kraepelin, 1899)이라는 학자에 의해, 조현병이 ‘조발성 치매’라고 불리던 시절이 있었고, 가족관계를 악화시키는 대표적인 질환이 조현병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상담학 사전, 2016)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당사자가 강압적인 치료환경에 놓이기 싫어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반면, 위기를 맞닥뜨린 가족은 보살핌을 제공해 주는 치료환경이 매우 절실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24년 3월 1일 현재, 필자는 병원 입원을 권유하는 친부를 때려 숨지게 한 40대의 기사를 또다시 접하고 있다.  가족이 온몸으로 막아내야 하는 상황이 거듭되고 있다.  국가 책임제의 필요를 촉구하는 가족과 전문가의 창도가 공허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하여, 입원과 퇴원이 용이하고, 입원시설의 환경이 개선되고, 퇴원 후 지역사회에서의 삶이 막막하지 않고, 외래 치료가 잘 활용되고, 가족은 자신의 삶을 사는 당연함이 투쟁을 통하지 않고서도 실현되었으면 한다.     


이런 바람이 유토피아적 환상으로 남지 않기 위해서는, 치료 장소에 대한 논쟁을 넘어서는 보다 광범위하고 유기적인 사고가 요구된다.  

인권침해와 치료권 보장이라는 두 주장이 첨예하게 부딪치는 공간에 환자 당사자와 가족은 존재하는가?  정신질환에 대한 전 국민의 공포증을 상쇄시킬 수 있는 방안과 지역사회의 인프라 형성이라는 관문은 어떻게 넘을 것인가?  더불어, 출소 후 여전히 병을 안은 채 우리의 이웃으로 살아갈 정호의 세상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인가?  마지막 질문의 열쇠는 정호의 삶을 정성껏 들여다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의 세상살이는 어디서부터 어긋난 것인가?  결국, 치료의 타이밍과 연결되는 물음 앞에 ‘지금부터라도’라는 대답이 출구가 되어줄 것이다.  「나의 무섭고 애처로운 환자」의 저자는 꾸준히 치료를 받는 것만이 진정한 반성이라고 했다.  형기가 정하는 기간 동안 꼼짝없이 유폐되어 있어야 하는 지금이 반성의 문을 여는 최고의 적기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신재활센터로 개소하였던 현재의 심리치료과가 이름을 바꾸면서 이에 대한 지원은 분산되었다.  정신건강전문요원으로 채용되었던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치료감호소의 추가설립과 같은 거대한 사업이 아니어도,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인프라의 활용을 고민하지 않는 사정이 갑갑하다.  

일개 직원일 뿐인 내게 비친 실상은 무력함을 더해줄 뿐이지만, 이 글을 통해서나마 환자와 그 가족의 무거운 삶이 우리의 시선에 머물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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