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환경을 만들 작은 '용기', 그리고 '신념'
아기와 함께하는 일상에서 유일한 소음은 아기의 울음소리였다. 종일 혼자 말하고 메아리처럼 받아쳤다. 아기는 생각보다 잦은 울음으로 일상의 적막을 깨웠지만, '공허함'까지 깨워주진 못했다. TV를 켜두면 집 안은 좀 더 사람 사는 곳 같았다. 아기와 나, 둘이 있어도 또 다른 누군가가 집 안의 생기를 불어넣었다. TV 채널은 주로 사람들의 말소리가 많이 나오는 뉴스나 웃음소리 가득한 예능으로 맞춰두었고 TV의 소음은 마치 나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와 안정감을 주었다.
퇴근 후 남편과 하는 짤막한 대화가 세상과의 유일한 소통이었다. 이마저도 남편의 잦은 야근으로 주말로 미뤄야 했다. ‘육아’와 ‘살림’이라는 비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남편만 바라보고 있는 내가 한없이 초라했다. 말수가 적은 편임에도 쌍방향 소통에 목이 말랐다. 울거나 자는 아기에게 일방적으로 대화를 퍼붓는 삶은 적적하고 목이 메었다.
TV는 그런 적막한 삶에서 사람 냄새를 풍겼다. 마치 BGM처럼 내내 TV가 켜져 있어야 사람 사는 곳 같았다. 나의 심신 안정을 위해 틀어두었던 TV를 어느새 자란 아기도 보고 있었다. 아기는 다채롭고 화려한 TV속 영상에 시선을 빼앗겼다. 말도 못 하는 아기는 아침이면 졸린 눈을 비비며 리모컨을 가져왔고 울다가도 TV만 틀면 순한 양이 되었다. 온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다니던 아기는 TV만 틀면 그대로 '얼음'이 되어서 더는 어지르지 않았다. 아기가 TV를 볼 때면 정신없는 일상에서 꿈같은 휴식이 찾아왔다. 아기가 원하니까 TV를 틀어주는 거라고 포장했지만 나도 그 달콤한 순간만을 내내 기다렸다. 그렇게 한 번 틀어놓은 TV는 꺼지는 법이 없었다. 주로 틀어놓는 채널은 교육방송이라는 명목으로 죄책감을 덜어냈다.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아기의 삶에는 충분히 TV가 스며있었다. 큰 결심으로 구매한 흰 천으로 된 TV 커버를 씌워봤지만 보기 좋게 실패했다. 아이는 단번에 TV의 커버를 벗기고 리모컨으로 TV 켜는 시늉을 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며칠 후 거실의 벽면에서 TV를 걷어냈다. 아기는 생각보다 TV가 없는 집 안 환경에 잘 적응했다. 문제는 다름 아닌 나였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몇 번이나 잘 노는 아이에게 들락거리며 아이의 안색을 확인했다. 행여 아이가 영상을 생각할까 봐 온갖 열정을 쏟으며 아이와 놀이에 참여했다. 아이가 영상에 몰입해 있을 시간은 동시에 나에게 자유 시간이었으니, 자유 시간이 한순간에 달아난 것이었다. 노동의 강도가 몇 배로 거세진 육아에 방전될 참이었다. 고단한 심신을 일으켜 먼발치의 아이를 바라봤다.
그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건 혼자 있는 아이를 바라보지 못했던 '나 자신'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아이가 엄마와 노는 걸 좋아하는 것은 맞지만 혼자서도 놀 줄 알았다. 엄마가 집안 일 하는 시간을 기다릴 줄도 알았고, 혼자서 노는 시간을 즐길 만큼 아이는 자라 있었다. 아이 혼자 노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지 못하고 아등바등하던 스스로를 내려놓는 '용기'가 필요했다.
'용기'를 내서 아이 혼자 노는 모습을 지켜본다. 주로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일상이지만 작은 '용기'도 분명 필요했다. 그렇게 얻은 에너지는 고스란히 아이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졌다.
화려한 영상이 빠진 일상에 책이 빼곡히 들어왔다. 책으로 채워진 하루는 단조롭지만 우리는 더없이 풍요로웠다. 작은 아이는 앉은자리에서 수 십 권은 펼쳐보았다. 비록 그림을 읽어나가는 것이지만 아이는 무궁한 세계에서 무한한 꿈을 펼쳤다. 더 늦기 전에 환경을 바꿔준 나의 '용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아이가 36개월 무렵이었다.
제법 큰 아이는 놀이터에서 또래들과 어울려 놀기도 했다. 또래들의 대화에선 유행 중인 만화 속 등장인물들이 즐비했고, 내 아이가 그것을 알리 만무했다. 결국, 내 아이는 그 놀이에서는 빠지게 되었다. 그날 저녁, 유독 더 작게 느껴졌던 아이의 뒷모습에 처음으로 TV 없는 환경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이따금씩 또래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만화를 주입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이도 만화를 모르는 자신을 그렇게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만화 캐릭터가 나와있는 컬러링북이나 워크북으로 캐릭터 예습을 시켜줬지만 아이의 반응 역시 미지근했다. 지금 내 신념대로, 우리 집 환경대로 아이를 키우면 되겠다는 확신만 안겨줬다.
당시에는 아주 큰 고민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그날의 해프닝은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 삶도 그러하리라. 멈춰 서서 보면 거대한 바위가 지나고 보면 대지에 널린 수많은 조약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육아도 작은 삶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큰 시련이 다가와도 언젠가는 지나가기 마련이고 지나고 보면 그것은 과정이었다는 것을. 지금처럼 차선의 환경이라는 좋은 돌멩이를 고르는 일, 엄마로서 내가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