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의 위로

그림책 5000권, 거실의 작은 도서관

by 아리스

책과 친하지 않은 내가 엄마가 됐다. 아기에게 좋은 것은 뭐든지 주고 싶었다. 그중 가장 접근이 쉽고 매일 줄 수 있는 것이 책이었다.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아기에게 헝겊책 3권을 닳도록 읽어주었다. 아기는 책을 물고 빨고 가지고 놀았다. 아기가 책을 좋아하는 거라고 확신했다. 돌 무렵 보드북으로 된 일명 '돌쟁이 시리즈' 전집을 사줬더니 작은 고사리 손으로 책장을 넘기며 책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책을 읽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는 유독 창작 책을 좋아했다. 인터넷의 선배맘들이나 서점 직원들은 영역별로 고루 읽혀줘야 좋다고 했지만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책을 읽어주면 아이는 까르르 웃기도 하고, 무서워서 오들오들 떨기도 했다. 조금 슬픈 책에 엄마의 감정이 듬뿍 들어간 날이면 눈물을 펑펑 쏟기도 했다.


아이는 밤낮 가리지 않고 책장에서 책을 꺼내어 읽어달라고 가져왔다. 다른 것은 몰라도 책을 읽어주는 것만큼은 미루지 않았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고무장갑을 벗어던지고 아이와 책 속에 퐁당 빠졌다. 아이는 같은 책을 수십 번 읽어달라고도 했고, 쉴 새 없이 책을 가져왔다. 그런 날이면 하루에 70권을 읽은 적도 더러 있었다.


아이는 엄마가 읽어주는 그림책을 무엇보다 좋아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날에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여행을 갈 때도 책을 꼭 가지고 다녔다. 캐리어에는 여행 짐보다 그림책이 더 많은 상황이 빈번했다.


재미있는 놀이는 많지만 책을 읽어주는 행위는 무엇보다 쉬웠다.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은 언뜻 쉬워 보여도 금방 질리기 일쑤고 치우는 일도 상당하다. 집 안에서 하는 숨바꼭질은 스릴 넘치지만 체력이 많이 소모되어 쉽게 지친다. 동생에게 젖을 주면서도, 재우면서도 아이에게 책을 읽어줄 수 있었다. 언제라도 책을 읽는 행위는 접근이 쉬웠고 편했다. 책과 아이를 끌어안을 내 품만 있으면 어떤 준비물도 필요 없었다.


집 안에 책이 쌓여갔다. 거실 소파를 치우고 거실 한쪽 벽 면에 책을 가득 채웠다. 그래도 책을 꽂을 자리가 부족했다. 이번에는 벽에 달려있던 TV를 걷어내고 반대쪽 벽면에도 책을 가득 채웠다. 그래도 들어가지 않는 책들은 방마다 조금씩 배치했다. 집 안 곳곳에 책이 있었고 거실은 우리 집의 작은 도서관이 되었다. 그렇게 집에 있는 책이 5,000권이 넘어갔다. 그 5,000권을 다 읽고도 아이는 책을 더 읽고 싶어 했다. 주기적으로 책을 회전시켰지만 한계가 있었다.


차츰 도서관을 이용하게 되었다. 나와 남편 그리고 아이 셋까지 도서관 회원으로 등록하니 2주에 50권씩 빌릴 수 있었다. 거기다가 관할 시의 타 도서관에서도 중복 대출이 가능하니 한 번에 최대로 빌릴 수 있는 책은 85권이었다. 아이들이 책을 좋아한다는 열정으로 한동안 매주 수레 가득 책을 빌려왔다. 시간이 지나자 허리 통증으로 일명 '책셔틀'은 그만두었지만 여전히 아이들과 도서관을 애용한다. 이제는 아이들과 직접 도서관에 방문해서 서가에서 직접 책도 고르고 그 자리에서 읽어준다.


첫째 아이는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이다. 그럼에도 책을 읽어달라고 가져온다. 가끔은 '너 혼자 읽어', '이제 컸으니까 네가 읽을 줄 알아야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만 이내 가다듬는다. 아이는 분명 혼자 읽을 수 있지만 엄마의 생생한 육성과 따뜻한 품을 느끼고 싶었으리라. 훌쩍 커버린 아이가 어느 날 책을 가져오지 않는다면 벌써부터 서운함이 밀려온다.


여전히 아이들을 내 무릎에 앉히거나 한 이불을 덮고 누워 책을 읽어준다. 아이들은 그림책 속에서 울고 웃는다. 아이들은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엄마의 사랑을 확인하고 갈구한다. 책을 읽을 때만큼은 아이들은 엄마의 품을 갈구하지 않아도 얻을 수 있으니 책이 좋았으리라.


힘든 날이면, 피곤한 날이면 하루만 건너뛰고 싶었지만 어느새 나도 책을 읽어주는 시간이 기다려졌다. 책을 읽으며 맡는 아이들의 살 냄새, 따뜻한 체온, 맑은 웃음소리는 하루의 피로를 걷어냈다. 아이들을 위한 행위라고 여겼던 그림책에서 내가 위로를 받고 있었다. 그림책은 아이와 무궁한 상상의 나래를 같이 탐험하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수단이었다. 아이들은 오늘도 책을 듬뿍 꺼내어 가져온다. 오늘도 위로를 받을 그림책과 아이들이 내 품을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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