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흐름에 따라 시대가 변했다고 해도, 여성들에게 주방은 요리를 하는 공간 그 이상일 것이다. 부부가 하나의 공동체에 살더라도 여전히 인테리어의 팔 할 이상은 여성의 손길과 시선이 머무는 곳에 관여하게 된다. 어느 것 하나 빠트릴 수 없는 공정이지만, 요즘 인테리어에서 유독 '주방'이라는 공간에 무게를 더 많이 두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세 번째 공사를 앞둔 나의 N번 째 집은 요즘 대세인 '대면형 주방'은 엄두도 못 낼 특이한 주방 구조를 자랑했다. 주방이 마치 옛날 변소처럼 공용 공간에서 멀찍이 떨어져, 식탁 위치에서도 저 멀리 숨어버린 형태였다. 흡사 '부엌데기'라는 단어가 생각날 만큼 고립된 공간. 구조 변경이라는 마법은 '돈'이면 못 할 게 없으나, 나는 '가성비 인테리어'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던가. 구조가 마음에 안 들면 어떠하랴,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찾기로 했다.
이전 세입자가 쓰던 주방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대리석 상판과 상하부장의 상태를 요목조목 살피며, 레인지 후드와 쿡탑 교체, 그리고 상하부장 리폼(필름 시공)만으로 최적의 가성비 시나리오를 작성했다. 하지만 이 야심 찬 계획은 시공 직전, 처참히 무너졌다. 안 그래도 좁은 주방에 '냉장고가 들어갈 공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리폼 계획대로라면 냉장고는 식탁 옆, 즉 공용 공간 한복판에 기둥처럼 우뚝 서야 했다. 비움의 미학을 실천하려 애쓰던 나에게, 시선이 모이는 곳에 거대한 가전이 버티고 서 있는 풍경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분배기까지 애써 데드스페이스로 옮기며 시각적 개방감을 확보하는 여정에서 냉장고가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었다.
결국 초저가 예산안을 폐기하고, 철거부터 디자인까지 다시 계획했다. 기존 상판 일부를 과감히 잘라내어 냉장고를 주방 안으로 욱여넣고, 좁아진 동선을 확보하기 위해 가벽 쪽으로 상판을 연장했다. 그렇게 좁게나마 'ㄷ자 형태'를 띄게 된 주방은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하지만 새로운 문제가 고개를 들었다. 냉장고 자리를 확보하다 보니 수전과 냉장고 간 거리가 한 뼘 남짓으로 좁아진 것이다. 이럴 경우 설거지를 할 때마다 팔꿈치와 냉장고가 만나는 불상사를 피할 수 없었지만 계획을 쉽게 변경하지 못했다.
현장에서 머리를 모아 의논하던 중 설비를 담당하던 욕실 사장님이 통쾌하게 한마디를 던지셨다. "설비는 서비스로 하죠. OO야(주방 사장님에게), 너는 얼마 추가되냐? 주인님이 돈이 많이 없으시단다."
무심한 듯 툭 던진 그 한마디에 가슴 한구석이 찡해졌다. 그렇게 기존 시나리오에 없던 주방 철거가 시작되었고, 주방 타일은 덧방으로 예산을 아끼며 최적의 동선을 만들어 나갔다. 주방 걸레받이부터 상하부장, 상판 대리석, 그리고 싱크볼과 수전까지. 자재 하나하나를 직접 고르며 완성해 가는 과정은 고단했지만 즐거웠다.
기적처럼 탄생한 ㄷ자 주방은 이제 우리 집에서 가장 효율적인 공간이 되었다. 좁은 평수의 한계를 아이디어와 전문가들의 배려로 극복해 낸 결과물. 비록 화려한 대면형 주방은 아니지만, 동선 하나하나에 나의 고민과 '드림팀'의 온기가 서려 있기에 그 어떤 주방보다 빛을 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