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 그리고 벽지

공간의 무드를 결정하는 한 끗 차이의 미학

by 아리스

조명과 화장실, 그리고 주방까지 집의 큰 틀을 만들어내고 나니, 거칠던 공사장에서 서서히 주거의 온기가 스미기 시작했다. 이제 집주인인 내가 해야 할 임무는 집 안의 온도를 정하는 일. 집의 무드와 '결'을 결정짓는 바닥과 벽지를 선택하는 일이다. 인테리어의 가장 기본이면서도, 가구와 소품이 놓일 '도화지'가 되어줄 이 선택에 집 안의 톤이 좌우될 것이다.


하늘 아래 똑같은 화이트가 없다고 했던가. '화이트 톤'이라는 모호한 단어 속에는 실제로 수천 가지의 '화이트'가 존재했다. 자칫 순백의 천사 같은 '화이트'를 잘못 선택했다가는, 벽지와 바닥만 공간에서 붕 떠버려 안정감 없는 차가운 공간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었다. 요즘 인테리어 트렌드에 따라 이 수많은 화이트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따뜻한 베이지를 한 방울 떨어뜨려 포근함을 극대화하는 '샌드 화이트(Sand White)'와, 고급스러운 그레이가 스며 차분하고 세련된 무드를 자아내는 '포그 그레이(Fog Grey)'.


각양각색 화이트 중 하나를 셀렉하기 이전에 나는 거실의 중심인 아트월에 '월넛' 컬러의 포인트 필름을 먼저 구상했다. 30년 된 구축 아파트의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면서도, 시간이 흘러도 질리지 않는 클래식한 무게감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짙고 깊은 월넛의 결이 아트월을 채우자, 이제 이 묵직한 나무색을 부드럽게 감싸 안아줄 '바탕색'의 정체가 더욱 분명해졌다.


바닥과 벽지 역시 예산의 한계를 극복하는 '차선책의 톤온톤'을 선택했다. 바닥재는 구정마루 광폭 대신 한솔의 '이모션블랑'을 선택했다. 이모션블랑 특유의 매트한 질감은 마치 포세린 타일을 깔아 둔 것처럼 고급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마루의 따뜻한 감성을 빼놓지 않았다. 따스한 베이지 톤의 이모션 블랑은 공간에 묵직한 안정감을 깔아주었다.


벽지는 요즘 다 한다는 '디아망'에서 한 단계 내려와 LX 베스띠의 '라임플라스터 스톤그레이'를 매칭했다. 디아망의 보급형이라는 베스띠는 그 입체적인 질감만큼은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 화이트 베이스 안에 은은하게 스며든 그레이 톤은 빛의 각도에 따라 깊이감을 더하며 집 안의 무드를 완성했다. 자칫 너무 노랗게 치우칠 수 있는 베이지 톤의 바닥을, 벽지의 차분한 스톤 질감이 세련되게 눌러주며 중성적인 매력을 완성한 것이다.


베이지의 온기를 머금은 타일 같은 바닥과, 회회한 석고의 입체감을 닮은 스톤그레이 벽지. 이 둘이 만나는 지점에서 우리 집은 차갑지도, 그렇다고 너무 올드하지도 않은 오묘한 '그레이지(Greige)' 톤의 옷을 입게 되었다. 3500만 원이라는 한정된 예산 안에서 '보급제'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보석 같은 자재들을 찾아냈던 그 치열한 안목이 비로소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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