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또한 지나가리라.
작은 생명체는 적막한 집을 울음소리로 가득 채웠다. 어렵게 재워서 침대에 내려놓은 아기는 길어야 30분을 넘기지 못하고 울음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는 아기의 울음소리에 이유 없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생후 며칠 안된 아기는 잠깐 자거나 젖을 빨거나 울었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은 일상이었다.
아기가 울면 딱딱해진 젖을 물렸다. 아기는 두 손을 꽉 쥐고 머리에 땀방울이 맺힐 정도로 온 힘을 다해 젖을 빨았다. 딱딱한 젖은 아기의 살고자 하는 욕구로 이내 말랑해진다. 불편했던 가슴의 통증이 사라진다. 젖을 먹다 보면 스르르 잠이 들기도 한다.
까무룩 잠든 아기를 침대에 눕히기 위해서는 엄청난 전략이 필요하다. 고양이처럼 유연한 자세가 중요하다. 허리를 낙타처럼 굽힌 채 아기의 등이 침대에 닿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눕혀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젖꼭지가 아기의 입에서 빠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기의 머리부터 발 끝까지 침대에 내려두었다면 엄마의 포근한 품을 이불로써 재현해야 한다. 모든 것이 평온하다면 마지막은 아기의 입에서 젖꼭지를 아주 살며시 빼내야 한다.
아직 끝이 아니다. 발 뒤꿈치를 들고 도둑처럼 걸어야 강화마루 특유의 '턱' 소리가 나지 않는다. 방 문을 닫을 때도 마치 슬로 모션처럼 모든 과정이 치밀하고 천천히 실행돼야 한다. 그렇게 아기를 침대에 재우기 성공하고 나면 공허함이 몰아닥쳤다.
이유 없는 눈물이 자꾸만 흐른다. 잠깐의 고요함이 무서웠다. 언제 터져 나올지 모르는 울음소리가 두려웠다. 내가 낸 소음으로 아기가 깰까 봐 스마트폰만 멍하니 바라본다. 그렇게 몇 분을 못 버티고 아기는 운다. 또 젖을 물리거나 흔들며 아기를 달랜다. 몇 가지 안 되는 육아 패턴은 단순했지만 힘들었다. 육아 과정은 행복의 연속이라고 포장했지만 순간순간 지옥 같던 때가 있었다. 신생아 시절이 꼭 그랬다.
잘 몰랐던 그때의 눈물, 두려움, 좌절감 등의 이름은 자책이었다. 지금 와서 보니 그랬다. 분명 기저귀도 깨끗하고 잘 먹는데 아기는 전문가들이 정의한 수면 시간처럼 자지 않았다. 아기가 우는 것이 꼭 내 탓만 같았다.
출산하면서 얻게 된 신체의 변화도 한몫했다. 임신했을 때 짐승과도 같았던 거울 속 내 모습은 출산하면 돌아올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출산 후 바람 빠진 공처럼 넘실대는 뱃가죽과 거무튀튀해진 젖꼭지는 꼴도 보기 싫었다.
이제는 여성에서 아줌마라는 제3의 성으로 탈바꿈한 것 같았다. 예쁜 옷으로 포장하려고 해도 아기에게 좋은 순면과 어디에서나 젖꼭지를 꺼낼 수 있는 수유복을 입어야 했다. 어떻게 꾸며도 영락없는 아줌마였다.
아기와 살갗을 비비기 위해서 화장도 포기해야 했다. 모든 치장은 아기에게 좋지 않았다. 아기를 출산했으니 이론적으로 아줌마가 맞긴 하다만 26살에 아줌마가 되었다니 서글펐다. 여전히 예쁘게 꾸미고 싶은 나는 이제 고작 20대 중반인데 아기에게 모든 걸 맞춰야 한다는 현실에 감정이 끝없이 추락했다.
아기가 돌 무렵에 또 배가 불러왔다. 둘째 육아는 쉽다고 하던데 나에게 그 이론마저 성립하지 않았다. 둘째 아기를 먹이고 재우느라 첫째 아이는 뒷전이었다. 둘째 아기를 어렵게 재우고 첫째 아이를 마주하면 둘째는 꼭 울었고 첫째에게 미안한 감정은 또다시 나를 자책하며 우울이라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둘째 아기가 신생아였던 시절 그 우울한 감정의 화살은 둘째에게 돌아갔다. '둘째만 없었다면 첫째와 충만한 사랑을 나눌 수 있었을 텐데...' 첫째 아이와의 사랑에 훼방을 놓는 것 같았다. 둘째 아기가 울면 첫째 아이와의 시간이 끝났고 첫째에게 미안한 마음은 둘째에 대한 미움으로 변질됐다. 그러다 모두가 잠든 캄캄한 밤이면 아기를 미워했다는 사실에 또다시 자책하며 울었다.
시간이 흐르고 그 시절의 눈물들을 회상한다. 출산과 동시에 일어나는 변화들은 조용하게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불현듯 다가온 변화들에 적응해 가는 손발과 다르게 받아들이기 힘든 내면의 슬픔에 이내 눈물이 맺혔던 것이다. 이제야 아줌마라는 현실을 받아들인다. 아줌마라는 어감이 좋진 않지만 나는 세 아이의 엄마이고 장년의 여성이니 나는 아줌마가 틀림없다. 아줌마는 뭔가 억세고 독불장군 같은 이미지를 그려 넣었던 건 내가 그린 편견이었다.
아줌마의 삶은 여자의 삶보다 행복하고 매사에 감사할 줄 아는 그런 삶이었다. 여자의 삶보다 소박하지만 진실된 사랑이 있다. 그렇게 나는 여자에서 아줌마로 진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