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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현섭 Apr 05. 2024

애주

 난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 평소에는 이 사실을 딱히 의식하지 않고 지내다가도, 건강검진 문진표 속의 음주 관련 질문에 답하다 보면 '아! 내가 참 건전한(?) 사람이구나!'라는 걸 느낀다. 사람마다 '거의'의 개념은 다를 수 있으니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네 캔에 만원짜리 맥주 중 보통 두 캔은 유통기한이 지나서 버리는 정도다. 맥주를 사는 순간만큼은 '이런 기분에 한 캔 가지고 되겠어!?'라고 호기를 부리지만, 정작 한 캔도 반쯤 마시면 얼굴이 파프리카처럼 붉게 달아오른다. 아내의 채소 소비 패턴(구입 → 음식물 쓰레기)에 대한 불만을 여러 번 표출한 나로서는 다소 머쓱해지는 지점이다. 아내에 비해 처분 주기가 길 뿐, 사서 버리는 건 똑같으니까.

 그래서인지 난 술을 즐기는 사람을 보면 참 신기하다. 그나마 맥주는 시원한 맛으로 먹을 수 있지만, 소주는 한 번도 맛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가끔 지인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소주의 효용에 대해 물어봐도 납득할 만한 답변은 나오지 않는다. 그저 삼겹살이나 회 같은 음식과 어울린다거나, 소맥을 만드는데 필요하다는 식이다. 하지만 난 오히려 음식을 먹을 때 술을 곁들이면, 본연의 맛이 훼손된다고 느끼는 편이다.

 첫 직장을 탈출하게 된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술이었다. 주중, 주말 가릴 것 없이 일하는 것도 짜증 나는데, 회식은 또 왜 그렇게 많은지. 불과 15년 전만 하더라도 술을 잘 마시는 건 하나의 역량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요즘처럼 개인적인 이유를 들어가며 회식을 불참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일을 잘하는 것보다 상사가 주는 술을 넙죽넙죽 받아서 싹 비우는 게 미덕이었으며, 그건 고스란히 인사고과에 반영되었다.

 직장 생활을 하며 겪은 수많은 회식 중에서도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경영지원실장이 소집한 회식이라 경영지원실 산하 직원은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 참석했다. 삼겹살집을 통째로 빌려 모인 자리에서 경영지원실장은 자상한 얼굴로 편하게 먹으라며 오프닝 멘트를 날렸지만, 온화한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시간쯤 지났을 무렵, 경영지원실장은 주목하라며 외친 후 테이블에 올려놓은 술잔을 모두 치우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놓인 두 개의 맥주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러분! 혹시 꼴깍주라고 아시나요? 지금부터 제가 말아 드리겠습니다. 시작은 나랑 인사팀장이 하지." 소맥 두 잔을 들고 경영지원실장과 인사팀장은 러브샷 자세로 술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둘 다 맥주잔을 깨끗하게 비웠는데, 경영지원실장은 인사팀장을 바라보며 "다시!"라고 외쳤다. 그렇다. 꼴깍주는 잔을 완전히 비울 때까지 목에서 꼴깍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게 마시는 방법을 의미했던 것이다. 경영지원실장 대각선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나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 900미리 쿨피스를 한 번에 마신 적은 있지만, 꼴깍거리지 않고 액체를 마시는 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인사팀장! 목젖을 활짝 열고 그냥 들이붓는다고 생각해!" 세 번의 시도 끝에 인사팀장은 겨우 꼴깍주를 성공시켰다. 사레가 들리고, 연신 기침을 해대서 눈이 붉게 충혈된 상태에서도 인사팀장은 웃으며 말했다. "실장님! 이 좋은 걸 몸소 알려주시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인사팀장은 다음 타자로 경영관리팀장을 지명했고,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적중하여 내가 파트너로 지목되었다. "윤현섭님! 한 번에 성공시켜야 해. 알지?" 경영관리팀장은 본인의 임원 승진이 꼴깍주에 달려있다는 듯 전의를 불태웠다. 하지만 난 보기 좋게 실패했고, 실패하면 할수록 소맥에서 차지하는 소주의 비율은 점점 높아졌다. 다음부터의 장면은 연속적이지 않고 뜨문뜨문 머릿속에 남아있다. 그날 꼴깍주의 성공여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을 탔고, 눈을 떠보면 지하철역 벤치에 누워서 떨고 있었다. 그것도 몇 번이나.

 난 아내 역시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결혼하자마자 애가 생긴 이유도 있겠지만, 우리의 기념일에는 그 흔한 레드 와인 한 잔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과 일 년 사이에 아내는 애주가가 되었다. 시작은 우연히 발견한 순댓국집이었다면, 이제는 해장국, 짬뽕, 마라탕 등 모든 국물 음식에 소주를 곁들인다. 처음에는 "딱 한 잔만 먹고 싶다."는 입장이었다. 난 요즘 소주 한 병에 5000원인데, 한 잔 먹을 거면 아예 시키질 말라며 잔소리를 했다. 연이은 잔소리의 결과, 이제 아내는 한 병 정도는 거뜬히 해치운다. 한 잔, 두 잔, 그리고 일곱 잔. 소주 한 병은 홀수 잔의 분량이라 또 시키게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말은 아내에 의해 확실하게 증명되었다. 한 병을 비우고 입맛을 다시는 모습을 보면, 더 시키고 싶은 표정이니까.

 누군가를 알고 지낸 지 35년 정도 되면, 보통은 그 사람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고 생각한다. 가족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술 못 먹는 남편을 만난 죄로 아내는 욕망(?)을 억누르며 살아왔던 것이다. 항상 화나 있는 상태가 본연의 모습이라고 외치는 헐크처럼, 자연스럽게 술을 즐기는 아내의 취향을 존중한다. (다만, 혼자 몰래 먹고 들어와 절대 안 마셨다며 항변하지 않길 바란다. 아무리 가글을 했어도 숨 쉴 때마다 알콜향이 뿜어져 나올뿐더러, 무엇보다 자꾸 거짓말하면 지옥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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