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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현섭 Jun 13. 2024

독백

melancholy

 하루하루 무력한 나날이 이어졌습니다. 아침과 저녁은 끝도 없이 잔인한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어떻게든 오늘을 살아내야 한다는 결심도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모래사장에 쓰인 글씨처럼, 의지는 잔잔한 파도에도 쉽사리 씻겨나갔습니다. 파도가 빠지고 깊은 우울이 밀려올 때면, 그저 어두운 곳으로 숨어들어 잔뜩 몸을 웅크렸습니다. 우울의 손톱은 가차 없이 등을 할퀴고 지나갔습니다. 깊이 파인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다른 상처가 새겨지는 식입니다. 이제 아프지 않을 때도 된 것 같은데, 미묘하게 다른 고통이 온몸과 마음을 내달립니다. 제 안에 멈춘 시계를 돌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잠이 많아졌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잠에 중독되었습니다. 의도적으로 말입니다. 생각의 셔터를 내리고 무의식 어딘가로 침잠하는 것이 그나마 덜 고통스러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히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막고, 아무리 좋은 꿈을 만나도 눈을 뜨는 순간 우울은 자! 이제 내 차례라며 끔찍한 시간을 예고했습니다. 풍선 달린 작은 상자에 저 놈을 구겨 넣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시간은 망각이라는 친구와 함께 서서히 감정을 증발시켰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미미한 변화지만, 수위는 착실히 낮아졌습니다. 최소한 오늘이 어제보다는 덜 괴롭겠지라는 생각으로 버텼습니다. 지루한 시간이 흐르자 마침내 감정 속에서 부유하던 생각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염전에 피어나는 소금꽃 같았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타협 불가능한 하얀색입니다. 그리고 의식의 바닥 여기저기 흩어진 생각을 집어 퍼즐을 맞춰보니 딱 하나의 문장이 완성되었습니다.


"도대체 왜?"


 당황, 슬픔, 간절함 그리고 증오가 닳아 없어진 곳에 남겨진 게 그것뿐이라니. 무척 허무했습니다. 그래서 전 게걸스럽게 이유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딸의 목숨을 앗아간 살인자를 향해 절규하는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저에게 닥친 불행을 매듭짓기 위해선 무엇보다 이유라는 놈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제 와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도 생각해 봤지만, 일단 의식에 뚜렷하게 새겨진 이상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딱 두 개뿐입니다. 외면하고 멈춰있을 것인가, 대면하고 나아갈 것인가. 오랜 고민 끝에 전 후자를 택했습니다.  인생을 통째로 저당 잡히기엔 당신은 너무 하찮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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