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상태로 듣기
대화상대의 이야기를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며 듣는 상태
아무런 가치판단이 없는 백지상태에서 듣는 상태
나를 지탱해 주고 위로해 주었던 건 다름 아닌 아이들이었다. 40~50분 수업시간은 힐링의 시간이었다. 특히 고정관념을 깨준 아이들이 나의 선생님들이었다. 내가 가진 잣대로 판단하다가 뒤통수를 맞을 때가 부지기수였다. '아이들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는 말을 몸소 깨달아갔다. 이런 날 선생님이라 불러준 많은 분들께 감사하다.
1. 비난에 고래는 춤출 시간을 뺏겼다.
어느 날 6세 남자아이와의 수업이었다. 꽃게를 만들며 바닷속을 표현하는 시간이었다. 사진자료를 준비하고 꽃게에 대한 배경지식을 전달하는 도입부를 마쳤다. 이제 아이의 생각을 따라가며 보조하는 역할을 할 중반부를 진행한다. 모형을 제작하는 시간이다. 드디어 아이만의 꽃게가 완성되었다. 기타 남은 블록으로 거실바닥을 바닷속으로 바꿀 차례이다. 마치 고급음식에 플레이팅 하는 듯 보인다. 오늘 일류요리사가 된 아이는 초록 블록을 해초로 빨간 블록을 물고기로 파란 블록을 물방울로 올려놓는다. 창의적인 이 작품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이의 것이다. 모든 것이 너무나 완벽했다. 수업이 잘 마무리되었다. 이제 인사 후 어머님께 아이의 창의적 생각을 상담할 차례이다...... 하는 그 순간 아이가 블록통을 뒤집어엎는다. 내 감정이 함께 쏟아졌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이의 것'이라는 생각은 온 데 간 데 없다. '잘 완성시킨 내 수업이 와장창 깨졌다.'는 나의 본성을 그땐 알아차리지 못했다. 안에 남아있던 잔여 블록들은 다 쏟아졌고 난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어느 정도 실력이 늘어 있다고 자만하며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것도 몰랐다. 난 부정적 감정을 발산하며 "너! 지금 뭐 하는 거야!"라며 억누르는 화를 표출했다. 질문도 아닌 나의 비난 섞인 말에 아이는 친절하게 대답까지 해 준다. 정확한 문장으로 기억할 만큼 이성은 온전치 않았다.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바닷속에 풀도 물고기도 부족해요. 꽃게가 배고파요. 그리고 이 통은 고래예요."라는 내용이었다. 난 잠시동안 일시정지 상태가 되었다.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꾸로 뒤집힌 블록통의 앞부분을 들었다가 놨다를 반복하며 즐거워한다. 그 고래의 입에 내 정신이 먼저 잡아먹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차!' 할 때 비로소 그 통이 고래로 보이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얼른 가방에서 눈 스티커를 꺼내 통에 붙였다. 미안한 마음에 모든 걸 내려놓고 아이와 바닷속에 풍덩! 빠져들었다. 어느새 고래의 배는 물고기와 해초와 물방울로 가득 찼다. 그렇게 바닥은 깔끔해지며 정리까지 되었다. 어머님께 바쁜 척하며 상담을 대충 하고 나왔다. 난 부끄러워 빨리 도망쳐야 했다. 그날 그 아이 덕분에 내 안의 틀이 또 한 번 깨졌다. 그날 이 한마디면 되었다. 아이가 한 행동의 이유를 궁금해서 "이렇게 한 이유가 뭐야?"라는 한마디면 되었다. 그러면 나에게도 고래로 보이고 아이를 더욱더 칭찬했을 거다. 그리고 그 칭찬은 그 고래를 더 춤추게 했을 거다. 칭찬받아 마땅한 아이는 오히려 비난받았다. 내 비난에 고래는 춤출 시간을 뺏겼다. 미안해.
언제까지 나만 춤추고 싶어 할래?
2. 통(고정관념)을 뒤집어도 된다.
상대의 행동과 말엔 그들의 근거가 있다는 걸 너무나 복 받게 10년을 배웠다. 통을 뒤집어도 되었다. 심지어 꽃게의 집게다리가 없어 보이게 만들어도 되었다. 중요한 것은 그 이유이다. 혹시 모른다. 아이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가 알고 있는 꽃게는 집게다리가 보이는데 선생님은 못 찾겠는데? 이유가 궁금한데 이야기해 줄 수 있어?"라는 질문에 아이는 대답할지 모른다. "어느 어른이 집게다리만 먹겠다고 잘라갔어요. 또는 상어한테 먹혔어요. 또는 이건 집게다리가 세상에서 제일 작은 꽃게예요. 요기 있는 블록이 집게예요."라고 대답할지 모른다. "그 어른이 집게다리만 잘라간 이유가 뭐야?"라는 질문에 "어른들은 자기가 먹고 싶으면 동물을 불쌍해하지 않아요."라고 대답할지 모른다. 이 대답 속에 아이의 배경지식이 있고 그 안에 아이의 감정이 있다. 수업주기는 주 1회이다. 일주일 후 다시 찾은 아이는 나와의 수업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고래가 누워있네. (낮은 목소리로) 자는 거야?" 아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일어나! 선생님 오셨잖아."라며 생각 못한 질문에 문제해결을 하였다. 통을 뒤집지 않는 한 눈 스티커는 늘 거꾸로 붙어있다. 그 고래와 눈은 마치 내가 보는 고정관념 같은 것이었다. 아이가 그 통을 뒤집어 줘서 쏟아진 것은 내 감정이 아니라 편협한 고정관념이었다. 고마워.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뭐야?
그렇게 말하고 행동한 이유가 뭐야?
3. 백지상태로 듣고 그림 그리기
아이들이 준 가르침을 확장시켜 백지상태로 듣기라는 나만의 언어를 만들었다. 백지상태로 듣기는 상대가 말할 때 백지를 꺼내 그냥 상대의 이야기를 그림 그리는 상태이다. 머릿속을 백지로 만들어야 한다.
내가 가진 고정관념들은 아이들을 다른 존재가 아닌 틀린 존재로 간주했던 경험이 많았다. 하루는 고양이를 주제로 5세 여자아이와 수업을 했던 날이었다. 아이가 만든 고양이는 다리가 세 개였다. 내가 가졌던 고정관념은 '수업이라면 사실을 정확히 표현해야 한다.'였다. 고양이의 다리가 네 개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날 다행히도 이 고정관념은 깨져있었다. 아이는 아침에 로드킬 당한 고양이를 보았던 것이다. 고양이를 닦아주고 치료하고 화장지로 묶어주며 수업을 마무리하였다. 이번엔 "고양이 다리가 하나 없잖아!"라며 고양이가 치료받을 시간을 뺏지 않았다. 고정관념은 그걸 벗어난 상황을 보았을 때 '틀렸다.'라고 단정 짓는 사고구조를 형성한다. 그러나 난 내가 가진 고정관념들을 다 알 정도의 지혜로운 사람도 아니고 내가 살아가는 방법이 답이라 생각할 때도 많다. 어리석은 내가 할 수 있는 건 머릿속에서 그런 생각을 빼버리고 백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음절하나 놓칠 수가 없다. 상대의 이야기를 그림 그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려는데 상대말을 놓치면 질문할 수밖에 없다. 안 그러면 못 그린다. 듣고 있는 중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다른 생각은 나중이다. 생각 속에만 그려놓다가 언젠가부터 공책에 실제로 그림을 그려놓기 시작했다. 가끔 그 그림들을 보곤 한다. 그러면 그들의 인생에서 나의 모습을 보기도 한다. 그들을 진정으로 이해하려 하는 자신도 보게 된다. 그제야 상대의 인생 속에 내가 함께 한다. 내 인생 속에 상대가 들어온다. 특정 순간이라 판단될 때 그 상태를 만들려 노력하고 있다.
상대의 말은 나무는 왼쪽에 그려져 있는데 내가 오른쪽에 그리려 하는 생각조차 없다. 나무는 왼쪽에 있어도 되고 오른쪽에 있어도 될 때가 있다. 심지어 중간에 그려도 될 때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그림은 자신의 세계에서 그리면 된다. 삶이 다 다르듯 그림도 다 다르다.
숱한 아이들과의 만남 속에서 난 백지상태로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가 많았다. 내 그림을 항상 들이대고 대할 때가 많았다. 내 짙은 그림을 지워주던 건 수많은 아이들이었다.
난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나?
4. 자체 평가의 기준
이 당시 난 지금보다 너무나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잘하고 있는 건가?'에 대한 자체평가의 절대적인 기준이 있었다. '내 아이를 나 같은 선생님에게 수업시킬 수 있나?' 이 기준에 "네"일 때도 있었고 "아니요"일 때도 있었다. "아니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시간 동안 만난 어머님들께 전해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죄송했고, 감사했습니다."
내 아이를 나 같은 선생님에게 수업시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