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그녀
1. 탄생 그리고 성장
'이곳은 어디지?' 처음 보는 곳이다. 마치 우주 같다. 몽환적이다. 몽롱하다. "응애! 응애!" 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이 우주가 어머니 뱃 속이였나?' 시야를 살짝 돌려본다. 사방이 순식간에 어두컴컴해진다. 아기가 보인다. '이렇게 어두운데 저 아기는 왜 이리 선명하게 보이는 걸까?' 아기는 뒤집더니 내게 등을 보이며 기어가기 시작한다. 여자아이다. 순식간에 걷고 뛰기 시작한다. 그녀가 살짝 고개를 기울여 입가의 미소를 보여준다. 너무 사랑스럽다. 그녀의 성장과정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는 이 장면에 난 완전히 몰입하고 있다. '뭐가 저리도 즐거운 걸까?'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결혼식장이다. 하객도 사회자도 주례사도 안 보인다. 어두컴컴한 공간에 그녀의 뒷모습만이 보인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기에 이곳이 결혼식장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신랑도 없다. '이상하다.' 그 순간 그녀가 나의 시선을 느꼈던 걸까.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나를 보려 한다. 얼굴이 궁금하다. 드디어 그녀가 나를 바라본다. 난 그녀를 보는 즉시 온몸이 굳어버린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하며 눈시울이 젖기 시작한다. 그 상태로 한참을 바라본다. 그녀의 표정이 밝지 않다. 날 안쓰럽게 보는 것 같기도 하다. 힘내라고 응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별을 예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녀는 사라졌다.
2. 생존
난 깨어났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고 여겼다. 그런데 시간이 꽤 지나있었다. 여전히 내 왼 손목에 올려져 있는 칼을 오른손이 잡고 있었다. 눈을 감기 전 화면 그대로였다. 깨었음에도 불구하고 잠시동안 그 칼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내 생애 제일 많은 양의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오른손을 펼 수 있었다. 차 안은 금세 습기로 가득 찼다. 습기는 마음껏 울라고 나를 배려하는지 외부세계를 차단시켜 주었다. 한참을 목놓아 울었다. 멈춰지지가 않았다. 멈춰지는가 싶더니 또 두 뺨에 흘러 내기기 시작했다. 도박을 안 하면 식은땀이 나는 상태. 몇 차례 호흡곤란. 매일밤 자살하는 법을 알아보다 잠든 나날들. 어머니 아파트담보대출. 내 뺨을 후려쳐 날 쓰러뜨린 날. 머리에 꽂혀있는 듯한 대못을 뽑아내기 위해 벽에 머리통을 박던 날들. 딸의 돼지저금통을 뜯고 있던 날. 마약을 구하면 하겠다고 생각한 날. 대체 어디까지 가려했단 말인가.
3. 이분화의 시작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나를 현실로 인도해 주었다. 그날 의식을 잃은 건지 지쳐 잠들어 꿈을 꾼 건지 난 모른다. 중요한 건 그날 난 뱅뱅이를 돌리던 미친놈을 보았다는 것이다. 미친놈은 나였다.
한 아이가 외친다. "나를 살려줘!"라는 외침이 그렇게 간절하게 들린 건 처음이었다. 그 아이는 늘 곁에 있어주었다. "힘내! 응원할게! 할 수 있어! 용기 내! 멈춰! 그만해! 나 힘들어! 그만해 줘!"라며 늘 말해주고 있었다. 난 듣지 않았고 무시했던 날이 많았다. 그날 흘렀던 많은 눈물은 그 아이에 대한 미안함이 상당 부분 차지한다. 그 아이도 나였다.
4. See You
우주는 어머니 뱃속 아니었을까. 난 돌아가고 싶었는지 모른다. 모든 걸 놓고 나의 존재가 시작된 그 우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녀는 기고 걷고 뛰며 결혼하는 인간의 성장을 보여주며 날 끌어당겨주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날 밀어주시며 또 낳아주셨다. 아직도 방금 꿈을 꾸고 일어난 듯 너무나 생생하다.
그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젠장! 이 미친놈이 뱅뱅이를 몇 년 동안 돌렸는지 너무 빠르다. 밥도 안 먹고 돌린 게 분명하다. 나가기가 불가능했다. 미친놈에게 그만 돌리길 간절히 부탁하고 난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기 시작했다.
난 삶이 안 풀리고 힘들 게 느껴질 때면 항상 그날을 생각한다. 나를 돌아보았던 그녀의 얼굴은 5살 여자아이였다. 그 아인 아름다운 성인의 몸으로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이 부자연스러운 모습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녀 덕분에 난 다음을 향해갈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