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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호 Nov 14. 2024

크리스마스이브

일찍 일어나기로 다시 마음먹은 날 아침에

1년 2개월이라는 시간이 흐른 어젯밤, 비로소 '언젠가'라는 존재가 내 앞에 현현했다.


'언젠간 써봐야지.'라는 생각으로 미뤄뒀던 이야기— 무려 나의 두 번째 글에서 일찌감치 다뤘었지만 그동안 용기가 안 나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한다. 그때는 베일을 씌워놓은 채로 다뤘었고 막연한 미래의 나에게 베일을 걷어내는 역할을 떠넘겼었다. '그래, 내가 걔다. 오래 기다렸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학원생활과 기숙사생활, 농구부 활동을 같이 하던 대식가 친구가 내 초등학교-중학교 동창의 연락처를 전해줬다. 둘이 먼저 연락을 주고받던 중 내 소식을 건네 들은 동창이 요청한 모양이었다.


아마 수업이 없는 토요일쯤, 늘 그렇듯 학교 모래운동장에서 농구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 동창 여자애가 찾아왔다. 중학교 때, 나와 달리 주위 환경과의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를 기준으로 공부하던 아이라 목표했던 과학고에 무탈히 진학한 이 친구는 멀리 타 지역에서 기숙사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 애환 중 일부라도 감면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지, 여자애는 나는 알아볼 수도 없는 수식과 단어들로 빼곡한 과제물을 보여줬었다.


오랜만에 만나도 어색하지 않은 어린 시절 친구와의 그리운 대화는 때가 되자 그쳤다. 그리고 아이는 나한테 찾아온 이유를 꺼내놓았다. 학교 선배와 원치 않는 관계를 가지게 된 것에 대해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자신은 정말 그것을 원하지 않았고 지워지지 않을 흉이 진 자신의 인생에 대해 절망하고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걸 털어놓는 대상이 나였던 이유도 이 때는 전혀 몰랐다.


나는 그 애의 아픔을 전혀 몰랐다. 겉으로는 덤덤한 척 위로하는 말을 했지만 실은 내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리지 않도록 붙잡고 있느라 진을 빼고 있을 뿐이었다. 섹스와 관련된 대화 주제가 왠지 모르게 나를 누르기 시작한 건 이미 중학교 때부터였으니까.  




대학생이 되었고,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소극장에서 연극을 보는 과제가 있었던,  [국어국문학의 이해]의 기말시험을 치른 날이었다. 국어국문학을 이해하자는 시험지에 미국 드라마를 주제로 아무 말이나 써서 내고 강의실을 나왔다. 그리고 청파동으로 갔다.


내가 살던 청파동의 익숙한 내리막길에서 그 여자애를 만나 밥을 먹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재회 이후 연락을 지속하지 않다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중학교 시절 학급 카페에서 마주쳤던 일의 여파였다.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학생 활동용으로 다음 카페에 만든 온라인 카페가 있었다. 종업 이후 5년이 지나자 아무도 찾아오는 녀석이 없었는데 거기서 우연히 마주쳐서 대화를 나누다 약속을 잡은 것이었다.


나는 중학교 졸업 이후에도 아주 가끔씩 카페에 들어가서 친구들이 남겼던 게시글이나 댓글을 보면서 추억에 아련해지는 느낌을 받는 것을 좋아했다. 친구들이 떠난 빈자리에 서서 변해가는 우리 인생의 순간을 조망하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리고 방장 마크가 달려있는 담임선생님의 '산그늘'이라는 어른스러운 닉네임을 보며 선생님을 그리워하는 것 좋아했다. 그러던 스무 살 어느 날엔 나 말고 현재 접속 중인 누군가 있었고 그렇게 2년 만에 그 여자애와 다시 이야기를 하게 됐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내가 그 애의 책상에 바보라고 써놓았다거나, 우리 이름의 초성이 똑같다는 이야기나, 내가 그 애를 자상하게 도와줬었다거나 하는 내게서는 잊혀졌던 자잘한 그 아이의 추억들을 듣게 되었다. 그러다가 종강 때 뭘 하냐는 이야기로 발전이 돼서 마지막 기말 시험이 있던 12월 24일 금요일에 약속을 잡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흘러서 종강을 했다. 청파동 카페 앞에서 만난 여자애는 고등학생 때와 달리 화장을 짙게 하고 있었고 분홍색 블러셔를 유독 진하게 한 모습이었다. 그게 밸런스가 너무 안 맞아서 어색해 보였고 카페 안에 앉아 있던 여자 두 명도 그걸 보고 흠칫했지만 애써 눈길을 주지 않으려는 눈치였던 것이 기억이 난다.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면서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가 용산 CGV에 미리 예매해 놓은 영화를 보러 갔다. 무슨 영화였는지는 기억나질 않는다. 하지만 영화를 볼 때와 보고 난 후 나를 대하는 태도나 손길에서 전에는 없던 남자에 익숙해진 여자애의 느낌을 받았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게 뭔가 불쾌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렇게 날 쉽게 만지지 않았는데', '언제든 원하는 대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주무를 수 있다는 듯 여유 있는 표정이 아니었는데.' 나는 바뀐 것이 없었는데 그 애만 어딘가로 나아간 것이 불편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고 명동에서 저녁을 먹었다. 여자애는 자신이 술이 세다했고 그래서 고기에 반주로 함께 소주를 먹었다. 그러면서 대학에서 사귀었던 남자친구에게 자신이 얼마나 다정하게 헌신했었는지, 그럼에도 헤어질 때 여자로서 모욕적인 말을 들었던 일이라든지, 그 애와의 섹스에 관한 이야기라든지를 했다. 그것들이 더해지니 뚝배기에서 내 그릇으로 국을 옮겨주는 여자애의 다정한 국자도 또 한 번 편치 않게 여겨졌다.  


밥을 먹고는 명동의 크리스마스 거리를 거닐다가 같이 학교로 갔다. 나도 어찌나 멍청한지 동창 여자애는 때가 되면 집으로 갈 거라고 생각했고 저녁에는 동기들과 저녁 약속을 잡았던 것이다.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여자애는 당연히 그날 돌아갈 생각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하철에서 내리지 않고 내 동기들과의 술자리까지 함께 했다.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만큼 순진했던 나는 동창 여자애와 잠자리를 한다는 상상을 못 했다.


동기들에게 내 친구를 소개하고 함께 술을 마셨다. 당시 유행하던 알록달록 뚜껑의 과일맛 소주를 마셨다. 다들 취할 때까지 마셨고 서로를 걱정하며 각자 집으로 헤어졌다.


한껏 취했고, 갈 곳이 없던 나와 동창은 우리 과 건물의 깜깜하고 좁은 층계에 쭈그려 앉아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여자애는 자신의 아버지가 우리 어릴 때 살던 작은 동네에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비밀처럼 말했다. 아는 분이었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으로 자신의 여동생이 과학고 재학 중 약을 먹고 세상을 떠난 이야기를 하며 울었다.


그 깊고 까맣게 끈적거리는 절망스러운 늪 같은 감정을 품은 여자애를 앞에 두고 무언가 해줘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그게 뭔지 몰랐다. 일단 동아리방으로 데려가 쉬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애를 동방 소파에 내려놓자마자 그때부터 여자애는 참지 않았다. 입을 손바닥으로 막고 몇 번이고 떼어냈지만 필연을 향해 작용하는 인생의 힘처럼 강하게, 본인이 제자리라고 생각하는 곳을 향해 엉겨 붙어왔다.


내 위에 걸터앉은 부드러운 감촉의 작은 몸과 그 몸에서 나오는 힘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강한 힘에 저항하는 것이 점점 버겁게 느껴졌다. 내가 간절하게 열망하는 상대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신념은 부드럽고 따뜻하게 말랑거리는 혀의 감촉에 조금씩 녹아버렸다. 그만 저항을 포기해 버렸다.  


결국 서로 모든 것을 숨기지 않고 꺼내놓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 앞으로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인지,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단순히 그 애를 상대로 가슴속에 뭔가가 뜨거워지지 않았기 때문인지 몸이 변하지 않았다.


여자애는 그 답답한 공간에 직접 도달하고 나서야 완전히 체념한 듯 내게 "안 해봤냐"고 타박과 원망을 하고선 굉장히 차가운 분위기로 변해 여학생 휴게실로 갔다. 아침이 되어 숨 막히게 어색한 상태에서도 몇 마디를 간신히 나누며 지하철 역으로 함께 갔다. 이때 동창 여자애는 내게 "남자는 다 똑같냐"고 물어봤었는데, 그 말이 이후에 나를 많이 괴롭혔다. 나도 걔한테 '그 선배 같았던 걸까', '그 전남친 같았던 걸까'


'나는 내가 생각하던 남자가, 내가 생각하던 사람이 아니었구나.'

날의 기억이 어떤 주술적인 속박되어 오랫동안 나를 끌어내렸다. 정말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이 날 관계를 맺지 못한 것은 인생이 나를 지켜주려고 그랬던 것만 같다. 


또 한 번 크리스마스가 찾아오기 전에 하고 싶던 이야기를 털어놓고, 해묵은 망설임을 털어낼 수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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