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머니는 여덟째여서 이름이 팔님이었다. 4년 전 주민등록상 나이로 정확히 100을 채우고 돌아가셨다. 2020년 12월 12일. 20201212 돌아가신 해와 날의 숫자도 아름답다. 이렇게나 쉬운 숫자인 데다가 한국 근현대사와도 연관 있는 마땅히 외울만한 날짜인데도 나는 따로 기일을 기억하지 않고 있다가 아버지가 가족 단톡방에 말씀을 하고 나서야 '그랬지.'하고 생각한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할머니 돌아가시던 날에 대해서 썼던 글이 있어서 혼자 다시 읽어보며 추억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평생에 늘 함께 존재한 가족을 잃는다는 건 영혼에 엄청난 충격을 준다는 걸 생각해 본다. 4년이 지났지만 달의 뒷면의 크레이터처럼 할머니는 내게 남아있다.
오늘은 할머니 돌아가신 것에 대해 감상에 젖기보다는 다른 것에 대해 말하고 싶다.
할머니는 말년에 그런 말씀을 하셨다.
"만다꼬 그래 아등바등 살았나 모르겠따."
침대에 누워서 언제 찾아올지 알 수 없는 죽음을 옆에 끼고 지나간 '삶'이란 것을 떠올리던 할머니는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인생이 뭘까. 어떻게 살면 되는 걸까.
인생에 있어서 적은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면 된다는 쪽, 많은 부를 획득하고 다양한 성취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얻어야 한다는 쪽으로 갈리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둘은 서로가 서로의 주장을 배척한다는 것도 생각했다. 양쪽은 서로를 진정한 답에서 눈을 돌렸거나 눈을 뜨지 못한 어리석은 부류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대립되는 가치관을 각각 설파하고 있는 브런치의 작가들에게도 각각의 추종자들이 달라붙어 자신의 입맛에 맞는 글들로 저마다의 삶을 고취시키고 있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적은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인생은 성공하기 위한 노력에 대한 나태를 합리화하는 건 아닐까, 인지부조화로 인한 심리적 불편감을 해소하기 위해 행동보다 태도를 쉽게 변화시킨 건 아닐까.
노년기에 인간적 품위를 유지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젊을 적 벌어놓은 돈을 충분히 비축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월든』에서는 노년기의 자유와 청년기의 자유를 맞바꾸는 게 딜이 성립하냐는 의문을 제시하기도 한다. 청년기의 자유가 훨씬 가치가 크다는 것이다.
나는 당연히 돈 많이 벌고 싶다. 노력하기 싫고. 근데 난 노력하기 싫어서 태도를 바꾸진 못할 것 같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나 자신을 의심하는 고통 속에서 살게 될 거다. 객관적으로 이미 내 나이는 서른 중반에 대학 졸업하면 반칠십이고 암울하다면 정말 암울한 상황이다. 그래도 최악은 아니다. 정신도 육체도 멀쩡하게 살아있으니까. 감사도 잊지않으면서 노력도 부단히 하면 되겠지 뭐.
인생을 어떻게 살지에 대한 가치관의 두 방향 차이에 대해서는 1학기 때 이미 [불교와 정신분석학] 조별 토론을 하면서 답을 내렸다. 둘 다 정답이고 자신의 선택에 대한 결과의 책임을 달게 질 수 있으면 어느 쪽이든괜찮다는 것이었다. 스무 살 대학생들도 내릴 수 있는 답이라는 점에서 문제 자체는 어려운 게 아닌 것 같다. 아니면 스무 살이라는 나이가 어려운 문제를 풀기에 충분한 나이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욕심은 많지만 나약한 인간으로서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이 어려운 부분이라는 것이다.
지난 학기는 저 방향으로 이번 학기는 이 방향으로 이래저래 살아보고 있다. 지난 학기는 스트레스 받으면서 4.3점을 받았고 이번 학기는 학점을 내려놓고 다른 가치를 좇고 있다. 시험 기간에 이렇게 글을 쓰면서 인생을 즐기고 있는 것만 봐도.
이번 기말 시험 성적을 받았을 때, 더 지나서 졸업을 했을 때, 다시 더 지나서 인생이 저물어갈 때 난 어떻게 살았던 순간 덕에 더 행복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