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뇽이 May 26. 2024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62번째

 23일 목요일.

 축제 2일 차. 수잔나가 며칠 전 축제를 같이 보자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뭐 입고 갈까요?"라는 카톡에는 답을 하지 않았다. 내 소관이 아닌 일에 대한 시시콜콜한 연락이 귀찮기도 하고, 첫째를 대학에 보낸 연령대 미국 부자 누나의 축제 드레스코드를 조언할 깜냥도 안되기 때문이다. 일단 나부터가 TPO에 맞춰 옷을 입는다는 행위를 해본 적이 없다. 아. 장례식이랑 결혼식은 빼고. 히키코모리의 주요 특징 중 하나인 <엄마가 간간히 사온 옷을 입는다>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히키코모리 생활을 한 10년 동안에 내가 옷을 산 적이 몇 번이나 있나? 몇 번이 아니라 없는 것 같다. 나가질 않는데. 큰 누나가 가끔 사서 보내준 옷을 입거나 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나는 정말 영락없는 어디 일본 드라마에나 나올 것 같은 성골 히키코모리다.    


 학교 정문 앞 스타벅스에서부터 수잔나를 에스코트해서 대운동장 닭강정 트럭에서 닭강정을 하나 사서 나눠 먹는 것으로 만남을 시작했다. 내가 닭강정을 좋아하는 것을 안다. 아, 그리고 수잔나는 까만 버킷햇에 까만 트레이닝복으로 알아서 힙하게 입고 왔다. 풍만한 가슴이 많이 드러나는 흰 탑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동시에 축제를 즐기는 그녀의 애티튜드가 느껴져서 멋있기도 했다. 이 날 저녁동안 수잔나의 가슴 부위로 시선을 파견하려는 본능의 오더에 저항하는 일에는 잘 성공했다. 본인도 노출이 어느 정도 신경 쓰였었는지 의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중 가서 먼저 꺼내기도 했다. 그러자 내 양심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노천 극장 주변에 앉아 음악을 들으면서 수잔나의 이야기도 듣고 내 이야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수잔나는 사랑이 많은 사람인만큼 나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을 찾기 위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주었다. 감사했다. 누군가 베풀면 감사하게 받으면 된다던 아빠의 말이 생각나면서 '나도 배알도 없이 있는 자의 호의를 취하는 사람이 됐나?' 생각했다. 수잔나가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하는 일들에, 사금 조각처럼 어딘가에 있기는 한 거 같지만 찾아도 잘 보이지는 않는 내 일말의 자존심은 약간의 반항심을 내비치며 나타났다.(기왕이면 내가 룻 보다는 보아스의 역할을 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그 알량하고 추한 녀석은 잘 위로해서 보냈다. 감사. 아빠를 재평가하며, 진정으로 내 깊은 곳에서 우러난 감사로 상대의 호의와 친절을 받는 것이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내 눈은 이따금씩 수잔나가 아니라 축제를 즐기러 온 한껏 꾸민 젊은 여자들에게 향하기도 했다. 그러자 04학번과 10학번으로 이루어진 3학년 듀오가 처량한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부끄럽지만 그런 생각도 들었다는 걸 솔직하게 시인해야겠다. 하지만 수잔나를 만나지 않은 세계를 생각했을 때, 수잔나를 만난 내가 훨씬 운이 좋고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도 함께 생각했다. 어찌 됐건 이 조합이 발생했다는 우연 자체가 정말 흥미롭고 소중한 일다.


 잔나비 공연 시간을 기다리며 내가 동네 탐험을 하다가 알게 된 라면 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평소에 돌아다니길 잘했다. 수잔나는 날부터 라면이 먹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마침 이 날 라면 맛집이 있다는 게 운 좋게도 떠올랐다. 지나다니면서 보면 항상 대기가 두세 명 정도는 있는 맛집이다. 세계음식축제-누리마실에서는 파라과이 부스의 밴드웨건 효과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지만 이번엔 그때와 다르게 다행히 성공이었다. 수잔나가 역대급으로 맛있다며 먹었다. 나는 라면을 크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어서 별 감흥은 없었다. 토핑 치즈가 굉장히 잘 녹는 형태로 돼있어서 그 효과성만은 인상적이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니 잔나비의 공연 순서가 됐다. 최정훈은 섬세한 감성에 대한 이미지만 있었는데 실제로는 락스타 같았다. 나는 이번 학기에 꼴랑지게 그래도 30명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경험을 해봤다고 관점변화가 생긴 건지, 이전과는 뭔가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가수가 위대해 보였다. 얼마나 큰 것을 뒤에서 짊어지고 있을지. 위에서는 그 보상으로 얼마나 자유로운지. 멋있었다 정말. 아직 종강한 것은 아니지만 <가창실기> 강의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순수한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24일 금요일

 

 오전 강의를 듣고 수잔나와 학식을 먹었다. 메뉴는 닭곰탕. 내 생각에는 수잔나가 저번에 맛있게 먹은 메뉴와 베이스가 비슷해서 닭곰탕을 잘 먹을 것 같았는데, 본인은 어감이 부정적이었는지 내키지 않아 했다. 먹어보더니 맛있다고 했다. 식사를 하고 사실 곧장 헤어지고 싶었는데 스타벅스를 가자 해서 그러겠다 했다. 사실 시간을 소소하게 아껴봤자 아낀 시간을 딱히 소중하게 사용하지 않는다는 걸 안 이후로는 무언가 함께 하는 것에 시간을 아끼지 않는 것이 인생에 더 도움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커피까지 다 마시고 둘째 누나의 육아 공백을 메꿔주기 위해 출발했다. 두 시간 가까이 걸려서 도착해서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 간식을 먹으며 쉬었다. 그리고 매형과 함께 조카를 하원시키고 매형은 나와 조카를 공원에 내려주고 다시 교회로 가셨다. 조카와 공원에서 이것저것 하면서 놀다 보니 다시 두 시간 가까이 흘렀다. 매형이 주차장에 도착해서 차를 타고 교촌치킨 포장주문 한 것 받으러 갔다. "제가 받으러 갔다 올게요."라는 말을 조금 더 빨리 했으면 나았겠다라는 생각도 했다. 


 집에 도착해서 매형과 메밀국수와 허니콤보 조합으로 저녁을 먹었다. 준비를 같이 하고 싶었지만 내가 도와주겠다고 무언갈 하는 게 매형 마음의 미안함을 키우는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시키는 대로 얌전히 식탁의자에 앉아있었다. 내 마음은 매형의 일을 줄여주고 싶은 것이지만 그 마음을 누르고 매형의 마음에 따르는 것이다. 상대방이 예의 차리려고 으레 하는 말과 눈치 없이 혼동하지만 않는다면 이게 옳게 가는 방법이 맞는 것 같다.


 식사를 하고 매형은 다시 교회로. 나는 조카와 집 안에서 각종 놀이를 또 시작했다. 힘들어서 잠깐 누워서 놀라치면 "앉으세요~." 하는 만 2살짜리. '그래, 이왕 오랜만에 왔으니 제대로 해야지. 미안하다.' 벌떡 일어나서 다시 논다. 중간에 너무 피곤해서 10분만 엎드려 있겠다고 진지하게 부탁할 때는 어른 같은 눈빛으로 나를 살피고 이해하더니 허락해 줬다.


 밤에 누나와 매형이 일을 마치고 순서대로 귀가를 했다. 누나랑 얘기도 잠깐 했다. 누나가 나보고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묻길래 번아웃 와서 의욕도 좀 없고 만성피로가 있다고 얘기했다. 그러다 누나와 매형은 둘 다 피곤해서 조카를 재우다가 같이 잠들었다.



 25일 토요일

 아침이 돼서 식사를 같이 하고 매형은 교회로. 누나는 매형의 지시로 나는 집에서 쉬라고 하고 조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휴식이 필요해 보였나 보다. 왼쪽 입꼬리가 귀를 향해 올라가는 것을 참지 못하는 나를 보며 같이 나가기 싫었구나 알았다.


 누나는 세 시간이나 나갔다 돌아오면서 조카 손에는 카네이션을 들려 나한테 줬다. "선물이에요~." 하며 현관을 들어오는 조카를 보니 신기하게도 그걸 입력하는 누나의 목소리와 영상도 동시에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꽃을 바라보면서 꽃을 받아본 적은 언제였나 생각했다. 엄청나게 오랜만인 것만이 분명했다. 낯간지러움을 이겨내고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점심도 푸짐하게 먹고 여동생과의 약속시간이 되어 누나집을 떠났다. 빵도 그렇고 뭘 정말 여러 가지 많이 먹었는데 찍어놓은 것은 별로 없다.



 금요일에 여동생이 내일 히사이시조 OST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러 가자 했다. 나랑 가자는 것도 그렇고 취소하기 아깝고 어쩌고 하는 걸로 봐서 말을 안 하지만 그동안의 불길한 조짐이 현실로 들이닥친 것 같았다. 남자친구와 헤어진 것이다. 그래서 노원구에서 청년들 자조모임 가려던 내 계획을 취소하고 여동생을 만나기로 했다. 나는 지브리에 대한 특별한 애착은커녕 피곤해서 귀찮기까지 했지만, 여동생 부탁 들어주지 못해 후회했던 경험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순수한 위로의 마음보다 그 동기가 컸다. 인간이 정말 이기적이다 싶으면서도 인간한테 순수한 감정이라는 건 없다고 하니 이 경우에도 역시 겸사겸사의 정신을 적용했다. 애초에 여자의 이별 순간의 취약함을 기회로 인식하는 본능을 지닌 남자가 여자의 이별에 대해 진심 어린 위로를 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 든다. 최선을 다해서 옆에 있어주는 수밖에.


 잠실역 2번 출구에서 동생을 만나서 석촌호수를 걸었다. 동생이 언제 찍었는지 내 사진을 멋지게 많이 찍어줬다. 카톡 프사로 잘 쓰게 됐다. 동생이 오늘의 목표는 자신의 프사를 바꾸는 것이라고 천명했던 만큼 나도 신경 써서 동생 사진을 찍어줬다. 동생도 신중하게 프사를 골랐다.


 공연은 음악에 대한 내 소양이 부족한 탓에 감각적인 향락만을 누릴 수 있었다. 끝나고 나와서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고 지하철에서 헤어졌다. 여동생과의 데이트는 유쾌하고 다정하게, 따뜻하게 지나갔다.


26일 일요일



 늦잠을 자서 기분이 좋았다. 일어나서 핸드폰부터 보려던 것을 참고 맥킨지 스트레칭을 짧게 했다. 그리고 일어나서 어김없이 산책을 나섰다. 귀찮아도 하는 게 낫다. 녹음이 무성해지는 계절이 되니 늘 찍는 포인트에서는 더 이상 기숙사 건물이 잘 보이지 않게 됐다. 돌아가는 길에 마주친 구도가 예뻐 보여서 사진을 남겼다. 날씨가 참 좋다. 누군가가 불행한 와중에 있음을 알고 있고, 그럼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화창한 날씨를 누리고 평온한 일상을 누리는 것이 조금은 마음에 걸려서 좋지 않은 기분도 들었다.


 스픽은 드디어 불꽃 100일이 되었다. 100일째 불꽃이 유지되면 메일로 뭘 보내준다는 안내를 따라 메일을 확인했다. 스픽 헌드레드 클럽 티셔츠 신청 링크가 와있었다. 링크는 비밀 유지해줘야 한다고 엄포를 놓는 문구를 보고 살짝 쫄기도 했다. 남녀 공용이라 내가 입는 티셔츠 실측 사이즈와 비교해 보고 XL로 신청했다.


 작은 성취를 하나 또 모은 것 같다. 재밌다. 생각을 뒤집어서 살아보자 생각하고 사니 인생에 소소한 재미들도 많이 생겼다. 다행이다.         

작가의 이전글 히키코모리의 소소한 인싸 체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