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8.12 기록
아침 일찍 짐을 꾸려 로비로 나서니 가이드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지난밤 쏟아진 백 년 만의 폭우로, 이번 북유럽 여행에서 가장 고대했던 '요정의 길'이 폐쇄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지루한 장마를 피해 예까지 왔건만, 얄궂은 비구름이 나를 쫓아온 것만 같아 허탈한 웃음이 났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발길을 돌린 곳에서 우리는 뜻밖의 비경을 마주했다. 웅장한 산세와 빙하가 녹아내린 맑은 피오르, 그리고 수면에 거울처럼 비친 산 그림자는 마치 대자연이 빚어낸 거대한 데칼코마니 같았다. 요정의 길을 잃은 아쉬움은 이내 새로운 풍광이 주는 경이로움으로 바뀌어 갔다.
트레하임에서 늦은 점심을 달래고 스탈하임 호텔로 향했다. 호텔 뒤편에 숨겨진 포토존은 그야말로 신이 내린 선물이었다. 골짜기 너머로 솟아오른 거대한 산봉우리가 금빛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식후 커피 한 잔을 손에 쥐고 푸른 하늘과 짙푸른 숲, 그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피오르를 내려다보노라니 마치 세상을 관장하는 신이 된 듯한 묘한 황홀감에 사로잡혔다. 이 벅찬 감동을 일상으로 가져가고 싶어, 기념품 숍에서 바이킹 배와 트롤이 그려진 마그넷을 골랐다. 나라마다 물가를 가늠하게 해주는 마그넷. 노르웨이의 체감 물가는 매서웠지만, 냉장고 문을 여닫을 때마다 이 멋진 풍경을 꺼내 볼 수 있다면 결코 아깝지 않은 값어치다.
이어서 플롬으로 이동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네뢰이 피오르드를 가로지르는 페리에 올랐다. 플롬과 구드방엔 사이를 잇는 이 항로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뱃길로 꼽힌다. 찌는 듯한 한국의 무더위는 까맣게 잊힌 채, 청량한 뱃바람이 온몸을 감쌌다. 기암절벽 사이로 여러 갈래로 흩날리며 떨어지는 칠자매 폭포의 물소리는 대자연이 연주하는 상쾌한 교향곡 같았다.
갑판 위에서 서늘한 바람을 맞다, 조금 춥다 싶으면 선실로 들어와 따뜻한 밀크티 한 잔으로 몸을 녹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누려보는 온전한 여유와 평화. "정말 오길 잘했다."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며, 내일은 또 어떤 경이로움이 나를 기다릴지 설레는 마음을 안고 숙소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