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담배에게 말했다. "난 오십 보 백보라는 말이 제일 싫어. 주인님께는 나보단 니가 훨씬 해로워."
"미친.. 너나 나나 주인님께는 그냥 나쁜 놈들이야. 오십 보 백보가 싫으면 피장파장으로 합의 보자. 아님, 도찐개찐?"
영업사원이라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다. 물론 술이나 담배는 영업사원이 아니라도, 혹은 해야만 해서가 아니라 좋아서 하는 거일 수도 있지만,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이 영업사원에게는 분명히 있다.
내가 한국담배인삼공사(지금은 KT&G로 바뀌었다)를 영업할 때였다. 진행이 잘 되어 수주를 하고 본격적으로 제품을 설치하기 위해 담당자와 미팅을 자주 갖게 되었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당시 담배인삼공사는 신탄진에 있었고 한번 미팅을 하게 되면 하루가 거의 날아가는 좀 먼 사이트였다.
보통 수주가 되어 제품을 설치할 때가 되면 영업사원의 역할은 줄어들고 소위 PM이라고 불리는 프로젝트 매니저가 담당자와 업무를 진행한다. 하지만 PM을 인사시키는 역할과 발주에 대한 감사,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는 명목으로 영업사원도 한 두 차례 더 미팅을 갖게 되는데, 문제는 실제 도입을 맡은 사이트의 담당자가 아주 깐깐한 인간이었다는 거다.
당시 담배인삼공사는 회의실에서 흡연이 가능했다. 어찌 보면 담배인삼공사라는 회사의 특성상 당연한 걸 수도 있지만 실내에서의 흡연이 불가능한 분위기가 된 지 오래인데 고객과의 미팅자리에서 담배를 피며 협의를 하다니. 흡연자인 나와 그 당시 그 사이트를 맡았던 담당 PM(내 오랜 친구다)은 회의 전에 무척이나 즐거웠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게 웬걸,
나름 잔뼈가 굵은 영업사원과, 모든 영업사원이 사랑하는 유능한 PM도 버거울 만큼 그 담당자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업무에 대한 내용보다도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을에 대한 깔봄, 뭐랄까 나는 갑이고 너는 을이야 식의 김하늘 대사가 생각나는 듯한 무시. 서울에서 신탄진까지 내려왔는데 커피 한잔 내오지 않는 무심. 이건 이때까지 무조건 해달라고 상의 없이 통보하는 무대뽀. 이 세 가지 무가 버무려지면서 풍기는 악취가 견디기 쉽지 않았다.
나보다 더 괴로운 건 PM 이었을 거다. 난 이제 퇴장이지만 그 친구는 끝날 때까지 그 담당자와 살을 섞어야 하니까. 베테랑 PM이고 친구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서울로 올라왔던 기억이 난다. 그때 그 친구 고생 참 많이 했다.
직장인은 다 마찬가지겠지만, 특히나 영업사원이어서 해야만 하는 일 중 가장 힘든 게, 바로 싫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거다. 싫은 사람과 웃고 비위를 맞춰주고 밥을 먹고 술까지 먹어야 한다. 내가 영업사원이 아니라면, 학교를 다니는 중이라면 절대 어울리지 않을 유형의 인간을 상대해야 한다는 피곤함.
그래서 영업사원은 나름의 소심한 복수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고객이 직접적으로 눈치채거나 느끼면 안 되기에 가끔은 영업사원이 아닌 PM이 대신 그 복수를 해주기도 한다.
위에 얘기한 담배인삼공사 인간의 경우 프로젝트가 끝나고 마지막 회의 때, PM은 소심하지만 확실한 복수, '소 확 복'을 시전 했다.'한국담배인삼공사 업무회의실에서 떡하니 테이블에 말보로를 꺼내놓고 피워댄 것이다.' 고객이 기분이 나쁘든 알아챘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왜냐면 을의 소확복은 너무나 지능적이어서 그걸 가지고 화를 내면 고객 스스로가 쪼잔해진다는 생각을 할 정도만 시전할 정도로 치밀하기 때문이다.
말보로를 꺼내놓은 게 행동으로 보여준 물리적인 소확복이라면, 싫은 고객을 만났을 때 내 마음에서 쏘아댈 수 있는 정서적인 소확복 광선도 있다. 이건 고객뿐만 아니라 사내에서 싫은 사람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복수다.
미수금이 쌓이면 경영지원본부의 압박이 시작된다. 그들은 그들의 일을 하는 것이기에 다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일부러 안 받아오는 것도 아닌데 마치 빚쟁이처럼 영업사원들을 취급하는,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재무팀장 혹은 재무이사가 항상 있다. 일부러 그런 사람들을 거기 앉히는 건가?
아무튼 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 여자는 내가 사무실에 있을 때마다 수시로 날 호출해서 돈 받아오라고 닦달했다. 좀 회사에서 쉬고 싶어도 그 여자의 호출이 무섭고 싫어서 외근을 나간 적도 많을 정도라면 어떤 느낌인지 알 것이다.
그날도 거의 난 그냥 멱살 잡혀 흔들림을 당하는 빚쟁이에 다름없었다. 차라리 마이너스 통장이라도 만들어서 일단 내 돈으로 메꿔버릴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옆팀 김 차장이 내 앞에 앉더니
"형님, 저 여자랑 같이 사는 남편도 있어요.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세요."
난 그 친구가 진지하게 말을 해서 더 웃겼다. 날 위로는 하고 싶은데 적절한 방법은 모르겠고 본인이 혼자 속으로 썼던 비기를 나한테 전수해 준 것이다. 근데 이게 도움이 되더라. 유치하고 어찌 보면 확인도 안 되는 지레 내 판단이지만(남편한테는 아마 무지 잘하는 아내일 수도 있으니까) 그냥 그럴 거라고 믿어버리니 내 압박과 스트레스는 아무것도 아닌 게 돼 버리는 마법이 펼쳐졌다.
일반 직업인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영업사원은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을 많이 한다. 특히 그게 사람과 연관되는 종류가 많아 더 힘들다.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동료처럼 매일 보니까 무뎌지는 경우와는 달리 영업사원은 그 직업의 특성상 계속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하기 때문에 더 그렇다. 그래서 난 영업을 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상대가 모르게 정말 싫은 고객에게 시전 할 수 있는 소확복을 하나씩은 개발하라고. 그게 만병의 근원이라는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덜 수 있도록, 그래서 어떤 인간이 당신을 괴롭혀도 끄떡없는 태양천골지체 금강불괴의 반탄강기가 될 수 있도록 무공을 연마하라고.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 건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이해한다. 하지만 실망하지 말고 계속 연습해라. 무림의 고수는 그렇게 쉽게 되는 게 아니다.
2탄에서는 사람과 관련된 일 외에 영업사원이 해야만 하는 일들을 얘기해 보자. 그런데 담배인삼공사 소확복은 정말 통쾌하지 않았는가?
사족 : 언젠가는 꼭 수없이 많이 만났던 고객들과 동료들을 등장인물로 하는 무협지를 쓰고 싶다. 정파와 사파, 마교가 등장하여 본인들만의 각종 비기로 서로를 공략하고 누군가는 잠시 천하를 통일했다가 다시 거세게 도전을 받는 스펙타클한 무협소설을 꼭 써보고 싶다. 그 안에서 펼쳐지는 온갖 비열한 술수와 책략을 격파하고 마침내 수많은 사람들의 교주로, 방주로 커나가는 주인공의 여정을,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사랑과 전우애를 아름답게 묘사하고픈 욕심이 있다. 당연히 주인공은 나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그 담당자는 최종보스까지는 아니어도 꽤 강력한 사파의 방주로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내 동료의 소확복은 그이를 무너뜨리는 연무차도검법으로 명명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