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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다른 이력서 - 번외 편 (나의 세뇌유산 답사기)

영업사원의 일상과 가족

조금 다른 이력서 - 번외편(나의 세뇌유산 답사기)


나의 직장생활을 돌아봤던 조금 다른 이력서 시리즈를 쓰면서 생각해 본다. 회사는, 직장은 나에게 어떤 의미였을 까? 많은 사건과 사고가 있었지만 결국은 늘 사람과의 관계였고 그 관계를 잘 풀기 위한 여정이었다. 하지만 그 관계는 어떤 조직에서 만났느냐, 어떤 일을 하는 회사냐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참 다양한 분위기의 조직들을 경험하면서 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었다.


돌아보면 어릴 때부터 대학 때까지, 빨리 사회에 나가 회사원이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살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마음이 가장 컸을 때 난 소위 말하는 불법다단계회사, 즉 피라미드 조직에 2주 정도를 붙잡혀 있었던 적이 있다. 조금 다른 이력서의 번외 편으로 그동안 얘기했던 대기업, 벤처기업, 사회적기업에 몸담기 전 쌩쌩한 대학교 시절 겪었던 나의 세뇌유산 답사기(참 제목 잘 지었다)를 시작한다. 혹시라도 나와 같은 경험을 겪었던 분들에게는 괴로운 추억을 상기시키는 것이 될 테지만 아직 경험해 보지 않은, 특히 젊은 친구들에게는 코로나 백신 같은 예방의 역할을 하길 바란다.


군대를 갔다 오고 복학을 앞두어 여러모로 몸과 마음이 편안할 때였다. 레퍼토리도 변하지 않는 그놈의 사진알바를 핑계로 그 후배는 날 양재동의 어느 빌딩으로 이끌었고 난 거기서 나와 비슷한 연배임에도 말끔하게 양복과 정장을 차려입은 수십 명의 젊은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게 바로 피라미드 세뇌작전, 즉 다단계로 가는 지옥의 계단을 오르는 순간이었다.


옷은 사람의 마인드를 바꾼다고 하던가? 말끔한 양복의 남자와 투피스 정장의 여자들은 무언가 나보다 더 어른스러운 말투와 태도를 가진 것처럼 보였고 나누는 대화도 마치 미녀대회에서 세계평화를 언급하듯 클래스가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무언가 바쁜 듯이 돌아다니면서 그때만 해도 보기 힘들었던 핸드폰을 손에 쥐고 열정적으로 누군가와 대화하는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그 모든 게 짜여진 연출이었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날 그곳에 데려갔던 후배는 같은 라인이라고 하면서 몇몇의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일단 그들은 유수 사립대에 다니던 내 학벌에 감탄하면서 역시 똑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자화자찬을 하는데 그걸 듣는 사람이 무척 기분 좋게 이야기한다. 첫인상을 나쁘게 가져가면 안 되니까 일단 무엇이든 칭찬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와 같은 라인의 선배들을 소개받고 무슨 한정식으로 거창하게 저녁을 대접받으면 첫날은 조용히 흘러간다.(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처음 오는 사람들하고만 그렇게 먹는다. 알고 보니 지들끼리는 다 골목에서 컵라면 먹더라)


다음날 아침부터 본격적으로 그들의 세뇌프로그램은 시작된다. 그들이 짜놓은 촘촘한 그물프로그램으로 내 뇌를 세뇌하기 시작하는데 솔직히 처음엔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약간 지루한데 그런 표정이다 싶을 때마다 예쁜 여자들이 말을 걸면서 하는 말이 있다. '운이 참 좋은 분인 것 같다'는 말이다. 이게 피라미드에서 듣는 게 아니라면 참 좋은 말인 게, 세상 어느 누구가 당신은 운이 좋다는 말을 싫어하겠는가? 근거도 없고 논리도 없지만 누군가에게서 계속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피라미드였지만 배울 건 배워야지. 난 그 후로 사람들에게 당신은 행운아라는 말을 자주 해주고 있다. 각설하고,


지금부터는 그들의 단어와 언어로 세뇌가 되어가는 과정을 차근차근 얘기해 보자.



● 라인

나를 거기로 이끈 후배는 나와 같은 라인이다. 정확히는 나의 상위라인이다. 그들은 그걸 하나의 회사처럼, 직급처럼 얘길 하는 데 아무튼 같은 회사 사람들은 같은 라인인 셈이다.


정말 재밌는 건 저녁을 먹고 잠시 넓은 홀에서 마치 커플댄스를 추듯 돌아다니며 '저는 어느 라인 누구입니다'라고 인사하는 시간이 있는데 내가 그렇게 나를 소개하면 거짓말처럼 모든 사람들이 위에서 얘기한 대로 '운이 좋다고, 좋은 라인을 타셨다'라고 부러워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다 계산된 프로그램이라는 걸 알아도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반복적으로 말을 해주면 듣는 사람은 정말 운 좋은 라인을 탄 행운아인 것처럼 세뇌된다. 좋은 라인에 속한 건 그만큼 빨리, 수월하게 돈을 버는 지름길이라고 믿게 하고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 바로 그라인에 속했다고 세뇌하는 것이다.



● 빽마진

늦은 밤이 되면 소위 '빽마진'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직역하면 마진을 돌려준다는 뜻인데 사실 이건 영업사원들이 영업마진을 회사에 다 안 주고 슈킹 하는 걸 뜻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피라미드에서는 이 단어를 성공한 선배가 후배들에게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하는 프로그램에 명명하더라. 별거 없다. 나 이렇게 주위사람들 홀려서 많이 팔았고, 그랬더니 이렇게 슈퍼카도 몇 대 있고, 집에서 당구도 칠 정도로 돈도 많이 벌게 되었다는 거짓말의 향연이다. 아직도 기억나는 정말 인상적이었던 얘기는 애인에게 프러포즈를 할 때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려서 현악 4중주의 캐논변주곡을 직접 들으며 반지를 줬다는... 지금 생각하면 무슨 드라마 리뷰도 아니고 이걸 믿어? 아니 실제로 그랬다 하더라도 이렇게 유치한 클리세를 감동받으며 들었다니, 그저 내 귀를 씻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이걸 매일밤 돌아가면서 다양한 상황을 설정해 개소리를 해대면 나도 저렇게 돈을 벌고 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심지어는 눈물을 흘리면서 열광한다. 내가 조금만 더 이걸 일찍 알았더라면, 조금만 더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했더라면 내 가족이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돈도 많이 벌었을 텐데 하는 생각. 이런 생각으로 엉엉 울면서 반성한다. 거짓말 같은가? 진짜다. 내가 그랬다. 아니 대부분의 빽마진을 듣는 잡혀온 사람들이 다 그렇게 된다. 그걸 그들 표현대로라면 '알을 깼다'라고 하더라. 이렇게 알을 깨게 하기 위해서 매일밤 이걸 거의 3시간씩 한다. 개XX들...



● 개별상담

위에서 설명한 라인의 총수와 개별적으로 상담하는 시간이다. 어느 정도 빽마진을 통해 세뇌가 됐다고 판단되면 즉, 알을 깼다고 판단되면 마지막 한 발을 쏘기 위해 갖는 시간이다.


이 상담을 할 때 드디어 사기꾼들은 자신들의 통장을 공개한다. 달에 천만 원씩이 찍혀있는 통장을 보여주며 이게 내가 이 사업을 시작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벌고 있는 돈이라고 살짝 흘려주면 마지막 세뇌가 완성된다. 이미 빽마진을 통해 알이 깨진 상태에서 계량적인 수치의 통장숫자를 보는 순간 난 진정한 그 라인의 일원이 된다. 그 통장의 숫자가 허수라는 걸 이미 의심할 생각이 없다. 세뇌가 완성된 것이다.


지금 글을 읽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멍청하게 속을 수 있냐고 혀를 차는 분들이 있을 거다. 다만 그러기 전에 지금도 존재하는 수많은 사이비종교를 생각해 보라. 게임용어로 '물량에는 장사 없다'. 열흘 넘게 계속 똑같은 소리를 듣다 보면 기계가 아닌 이상 넘어갈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 읽은 분들 중 경험하신 분들은 난 아니었다고 말하실 수도 있다. 맞다. 근데 그건 적어도 일주일이상 있어보고 해야 할 말이다. 대부분은 피라미드회사라는 걸 알면 바로 화를 내고 뛰쳐나가지만 조금 마음이 여린 사람들은 데리고 온 후배의, 선배의, 친구의 '나를 믿고 일주일만 있어달라'는 간절한 부탁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위의 과정을 거쳐 세뇌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 허우적 대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치밀한지 아는가? 지금의 잣대로 보면 허술하지만 그들은 심지어 집에 거짓말을 해서 돈을 얻어낼 각종 시나리오까지 구비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나 같은 경영학 전공자인 경우엔 공인회계사 준비를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하라던지, 공대생인 경우엔 모의창업을 위한 기계구입비용이 필요하다던지 같은 식으로 말이다. 공중전화박스에서 집에 전화를 할 때면 라인선배가 뒤에서 실제 통화를 몰래 코치하기도 한다. 참 열심이다.



마무리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아마 그때 형이 갓 태어난 조카까지 얘기하며 말리지 않았더라면 난 그 사업을 계속했을 수도 있다. 형은 나에게 조카가 널 삼촌이라고 부르지 못하게 하겠다고까지 하면 혼을 냈다. 근데 묘하게 그게 무지 슬프더라. 그래서 난 2주 만에 잘 탈출했고 그때의 경험을 졸업논문 주제로 삼아 쓰기까지 했다.


피라미드는 초조하고 우울한 젊은이들을 계속해서 파고들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혹은 스무 살이 되어 어엿한 사회인으로 직장인으로 어느 곳이든 소속하고 싶어 하는 건 모든 젊은이들의 꿈일 테니까. 너무너무 그 마음과 기분을 이해한다. 그곳에서 날 유혹하고 많은 사람들을 그 구렁텅이에 빠뜨려 자석요를 팔게 하던 아랫라인에 있던 친구들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다. 그들의 심정도 절박함도 안쓰럽게 느껴진다. 그 안타까움 만큼 그걸 기획하고 수많은 청년들을 폐인으로 만드는 윗대가리에 대한 미움도 당연히 크다. 수많은 젊은이들을 시작부터 구렁텅이에 처 넣은 그 인간들은 사형도 아깝다.


이제 진짜 마지막 하고싶은 말. 꼰대처럼 무슨 아프니까 청춘이니 젊어 고생이니 하는 얘기를 할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젊은이들이여 명심하라. 일확천금은 틀림없이 있을 수 있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피눈물을 먹으면서는 아니다. 피라미드는 그 뾰족한 꼭대기 삼각형으로 내 가족과 연인과 친구들의 살을 찌르며 돈을 벌라고 말한다. 심지어 돈을 벌지도 못하고 나 스스로가 폐인이 되는 데도 말이다. 이 얘기를, 다양한 형태의 회사와 조직을 경험했던 그냥 동네아저씨나 친한 선배의 잔소리로 한 번만 생각해 주기만 해 준다면 조금 다른 이력서를 쓴 보람으로 충분히 뿌듯하다. 지금 당장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지만 지금도 수없이 많은 이력서를 쓰면서 면접결과를 알려주는 문자음에 움찔하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사노라면은 불후의 명곡이다.



사족 : 피라미드의 기억을 거의 완전히 잊고 결혼하고 아이낳고 10년도 넘은 어느 아침 출근하는 차창 밖으로 난 정말 우연히도 날 그곳에 데려갔던 후배를,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후배를 보았다. 그런데.. 물론 나의 착각일수도 있지만 그 친구는 아직도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중에 다른 친구들로부터 그게 맞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정말 진중하고 똑똑한 후배였는데 너무나 아쉬웠다. 가장 아쉬웠던 건 그렇게 우연히 만났는데도 반갑게 인사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불법 다단계 피라미드는 10년의 세월도 주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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