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슬 입술이 씰룩거린다. 뭔가 얘기하고 싶어 미치겠다는 표정일 때 나오는 첫 번째 신호다. 영업1팀 고팀장은 늘 저런 식이다.
부아가 난 고팀장 : 봉팀장님, 이번엔 저희가 순서잖아요. 저희가 이번 프로젝트 얼마나 오랫동안 고생해서 준비해 온 줄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아니 내가 다른 팀 고생한걸 어떻게 아나? 설사 안다 해도 내 코가 석자인데 어쩌라고?
능글맞은 나 : 고팀장님. 우린 뭐 고생 안 하고 놀면서 하나요? 그리고 순서 얘기하시는 데 여기 사업기획팀 김팀장님도 계시지만 그동안 진짜 양보는 저희 팀에서 주로 한 걸로 아는데요? 그리고 여기가 무슨 에버랜드 청룡열차 타는 뎁니까? 순서 따지게?"
막무가내 고팀장 : 암튼 안 돼요. 제안서 제출도 저희가 먼저고, 김팀장님 저희꺼 먼저 해주세요. 가만 보면 왜 항상 김팀장님은 봉팀장님 부탁만 들어주시는 거 같죠?
제안서를 쓰고 PT를 담당하는 사업기획팀 김팀장은 의문의 1패다. 그런데 딱히 반박을 안 한다. 고팀장 말이 어느 정도는 맞기 때문이다.
김팀장은 나랑 아주 친하다. 사실은 대학 때부터 내 친한 친구고 이 회사에도 내가 추천해서 스카웃되어 온걸 고팀장도 영업2팀 강팀장도 본부장님도, 아니 회사의 모든 사람이 다 안다. 그래도 화를 낼만 한 상황인데 성격상 화도 못 낸다. 완벽한 의문의 1패인 셈이다.
김팀장은 발표는 물론이고 제안의 핵심포인트도 기가 막히게 찾아내서 제안서를 쓸 줄 아는 인재다 보니 모든 영업팀장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다. 경쟁회사에도 사업기획팀장의 역할을 하는 이가 있지만 영업마인드까지 갖추고 접대자리까지 열심히 같이 가주는 사람은 아마 김팀장이 유일하리라. 그걸 아니까 중요한 제안이 있을 때마다 이런 풍경이 벌어지곤 한다.
의문의 1패를 당한 김팀장 : 일단, 제안서 제출시점 좀 다시 확인하고 저희 팀원들 상황도 좀 볼게요. 이렇게 싸우셔도 어차피 다 제안서 잘 제출하고 그럴 거 아시잖아요. 제가 잘 어레인지 해볼게요.
말은 저렇게 해도 결국엔 우리 팀 제안에 더 신경 쓰고 힘을 줄 거라는 걸 난 다 안다. 이럴 때마다 고객과 하는 영업도 중요하지만 같은 회사의 다른 팀과의 내부영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절감한다. 그리고 그걸 꽁으로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할 따름이다. 사실 한 회사에서 이렇게까지 영업팀장끼리 얼굴 붉힐 일은 별로 없는데 이건 순전히 능력 있는 김팀장과 고집 센 고팀장 때문이다.
회의 때마다 벌개지는 고팀장을 뒤로하고 우린 담배를 피우러 나왔다. 치러야 할 숙제를 치른 후라 담배맛도 후련한 느낌이다.
김팀장 친구여서 뿌듯한 나 : 고팀장은 참 일관돼. 어떻게 매번 저렇게 벌개지냐?"
착한 김팀장 : ㅋㅋㅋ 그래도 열심히 하잖아. 저렇게 매번 조르는 것도 인정해 줘야 해.
실적이 나쁘고 위에서 쪼는 강도가 세질수록 영업팀장들은 예민해진다. 프로젝트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일견 사소해 보이지만 이런 불편한 상황까지 만들면서 애를 쓰는 것이다. 사실 내가 누구보다도 고팀장을 이해해 줘야 하는 사람인 것도 안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만들어진 회사라는 조직은 자연스럽게 내부에서도 경쟁하도록 최적화되어 있는 것만 같다.
내부영업중인 나 : 그나저나 이번에 우리 케리스 제안서 만들 때 누구 붙여줄 거야? 박대리 꼭 조인시켜 줄거지?"
내부영업 받는 김팀장 : 너 전에 고려대 프로젝트 수주하고 박대리한테 술 샀냐 안 샀냐? 일단 내가 그걸 안 상태에서 박대리한테 얘기해야 돼. 안 샀으면 그냥 희망 내려놔라. 걔 은근히 뒤끝 있다."
역시... 내부영업이 더 어렵다. 난 아직 완벽한 세일즈맨이 안 됐나 보다. 결정적으로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느 사이트의 어느 고객한테는 언제 술을 사고 뭘 먹었는지 몇 달이 지나도 기억이 나는데 불과 한 달 전에 수주한 프로젝트 사내 뒤풀이가 생각이 안 난다.
가물가물한 나 : 밥은 한번 산거 같긴 한데.... 하... 근데 영업팀장이 다른 팀 팀원 술을 사줬는지 안 사줬는지 이런 거까지 신경 써야 되냐? 그 팀원 부서팀장이 친구인데?"
충분히 아프게 꽂혔다. '왜 이래? 아마추어처럼'이라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김팀장의 화살이.
수긍도 빠른 나 : 알았어. 다음 주쯤 한번 잡아보자. 바뻐. 간다. 고생해라."
내부영업이 안 됐을 때의 문제는 꼭 사업제안할 때만 불거지지는 않는 것 같다. 엊그제도 갑자기 솔루션이 먹통이 돼서 고객이 노발대발했을 때 개발2팀 윤 과장이 휴일인데도 도와주지 않았다면 정말 낭패를 볼 뻔했다. 개발자들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기술발전 때문에, 들어가는 나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기가 계속 개발자로 남을 수 있을지를 늘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센스 있고 스마트한 친구들은 나중에 영업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영업사원들과 더 친하게 지내고 미팅도 쫓아다니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래, 아예 일타이피로 가자. 과거와 미래를 모두 손에 쥔다는 생각으로 박대리와 윤 과장의 내부영업을 한 번에 가는 거야. 이건 마치 연세대와 고려대의 입학사정관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입시설명회를 듣는 것과 같은 시추에이션이다. 아무려면 어떤가? 거기서 잘 설명을 듣고 난 서울대 가면 그만이지.
하지만 진짜 큰, 넘어야 하는 내부고객은 따로 있다. 30분 뒤에 있을 경영본부장과의 미팅은 생각만 해도 괴롭다. 아마 미수금 얘기를 할 텐데 또 얼마나 들들 볶을지 그 강도가 예상이 안되니 괴롭고, 한 번도 강도가 이전보다 낮아지지 않았다는 걸 알기에 죽고 싶다.
결국은 또 내부영업이다. 같이 들어갈 재무팀장을 영업해야겠다. 그 친구가 옆에서 도와주면 날아올 돌멩이의 크기는 이전과 똑같거나 더 크겠지만 맞자마자 바로 약을 발라줄 테고 약을 바르고 있는데 돌을 또 던지지는 않을 테니까.
오늘도 난 온몸으로 깨닫는다. 이놈의 몸뚱아리는 회사 안에 있든 밖에 있든 늘 영업을 해야 하는 영업사원, 아니 영업팀장임을 말이다. 담배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