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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학이 Oct 22. 2023

'미래'라는 사치

청각 장애인에게 입시란


고등학교 입학 후 모든 학생이 대학입시에 집중하는 체계로 바뀌었다. 아침 일찍 등교해서 밤늦게 집에 가는 것은 기본이고, 주말에도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했다. 중학교와 마찬가지로 고등학교의 수업방식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때는 부잣집 아이들은 별도로 과외로 공부하는 학생도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 야간 자율학습으로 각자 공부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학교 경비아저씨가 빨리 집에 가라고 독촉할 때까지 학교에서 마지막 남은 아이였다. 나에게는 미래라는 것이 사치였기에 목표라는 것이 없었고, 단지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군대훈련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나랑 매일 마지막까지 남는 학생이 몇 명 있었는데 그중에 한 친구는 부모한테 서울대 아니면 넌 아들도 아니라면서 반드시 서울대 가야 한다고 독촉받았다. 그래서 집에 일찍 가는 것은 부모님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남는 친구였다. 그 친구 본인도 부모님에게 ‘효도’하려면 꼭 서울대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 친구가 싸 오는 도시락은 진수성찬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 친구가 평상시에 잘 먹지 못하는 음식들 말이다. 고기, 햄, 달걀 등은 기본이고 각종 채소 및 해산물도 듬뿍 담아왔다. 그 당시 보온병은 부잣집의 상징이었는데, 그 친구를 포함하여 소수만이 가지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그 친구의 도시락이 부러웠다. 특히 삶은 달걀과 고급 샌드위치를 먹고 싶었다. 나는 기껏해야 간장이나 배추김치였다. 그 친구는 결코 나누어 먹는 법을 모르고 혼자 다 먹었다. 누가 뺏어 먹으라 하면 막았다. 그러니 더욱더 먹고 싶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 친구의 성적은 화려한 반찬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졸업 이후 삼수생하고도 서울대 진입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고등학교 3학년 나의 반은 남녀 합반이었는데 내가 혼자 좋아하던 여학생이 하나 있었다. 부잣집 딸로 얼굴에는 부티가 나고 옷차림은 화려했고 말은 지적이며 똑똑하게 잘하였다. 국어 수업 어느 날 그 여학생은 선생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잘 못 듣는 것은 ‘죄’가 아니냐고. 국어 선생님은 그것은 죄가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사고로 안 들리는 것일 뿐 다른 사람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설명해주었다. 나를 염두에 두고 한 질문인 듯했다. 성적이 전교 5등 안에 드는 공부도 잘하는 그 여학생은 나에게 차별 아닌 차별을 하는 듯했다. 내심 서운했다. 내가 범접할 수 없고, 혼자 짝사랑하던 그 친구가 나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니 어느 정도 받아들였지만, 충격과 실망이 컸다. 여자에게 한마디 말도 못 하는 숙맥이었는데, 그 사건 이후로 더욱더 심화하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양수리로 2박 3일 일정으로 MT를 갔다. 기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기차 안에서 소리와 몸짓을 연결해서 하는 놀이가 많은데 나는 당연히 끼지도 못하고 구경만 했다. 현장에서 장기자랑이라는 친구들, 기타 치며 노래를 부르는 친구들, 개그맨 뺨치게 재미나는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 농구 경기를 멋지게 하는 친구들, 남녀끼리 커플을 이루어 데이트하며 즐기는 모습 등을 보면서 나는 할 줄 아는데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나를 슬프게 했다. 그런 세계는 내가 가질 수 없는 세계라고 생각했다. 특히 여학생들은 재주 많고 멋진 남자아이들에게 환호성을 지르고 좋아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사랑도 할 수 없는 불쌍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사랑, 즐거움, 재능 등 나에게는 특별한 세계로, 가까이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숙맥, 고자라고 놀리는 친구들이 많았으니까.


내가 유일하게 말이 통하고 놀 수 있는 상대는 교과서와 참고서를 보는 것뿐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우리 아버지는 정년퇴직하셨고 퇴직금으로 슈퍼마켓을 차려 운영하였다. 그 당시에는 아버지는 심장병과 고혈압으로 지병이 있으셨다. 고등학교 3학년 끝자락이 되자 부모님은 나에게 대학 갈 형편이 안 되니, 양복점 가게에 취직해 배워 보는 것은 어떠냐고 했다. 지금까지 내가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것, 책보고 공부하는 것도 이제 포기해야 하는가 하는 슬픔이 밀려왔다. 그 이후 막판에 공부를 게을리하는 바람에 대학 입학시험에서 떨어졌다. 당시 담임선생님은 대학교와 과를 잘 못 고른 탓이니 재수해서 다시 도전하면 충분히 합격 가능하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재수에 따른 학원비가 만만치 않아, 재수학원을 한 달 다니다 말았다. 목표도 없고, 가고 싶은 과도 없고, 굳이 대학 가야 하나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막막했다. 버스를 타고 학원으로 가는 도중 영양실조로 버스 안에서 쓰러진 적도 있었다. 더는 공부를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에서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더운 여름날 펼친 조간신문 2면에 전면 중 반크기의 서울시 공무원 시험공고가 눈에 들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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