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사랑한다는 것조차도 몰랐어.
고델은 생각했다. 무엇이 아이에게 좋은 일일지.
바깥세상은 위험해. 그 말은 사실이었다. 티브이에서는 매일 누군가의 끔찍한 사고 소식이 흘러나온다. 등굣길에 납치되어 괴롭힘을 당해 중상을 입어 평생 장애를 입고 살아가고, 갑자기 내린 장대비에 진입한 지하 차도에 물이 고여 매일 가는 출근길에 지하도에 빠져 죽고,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하면서 안전한 인도로 걷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돌진한 차량에 치여서 죽는다. 하루에도 이 말도 안 되는 소식이 수십 가지나 전해진다. 이마에 힘을 주고, 심각한 표정으로 매일 안타까운 사건사고를 전하는 아나운서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고델은 섬뜩해졌다.
칭얼거리는 소리에 품 안의 아이를 본다. 샛노란 머리카락에 발그레한 붉은 뺨을 가진 소녀는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고델은 똑바로 바라보며 살포시 웃는다. 아이의 작은 손이 고델의 손가락 하나를 움켜쥐었다. 연약하디 연약한 하얀 손으로 낑낑 안간힘을 쓰면서. 놓지 않겠다는 듯이. 고델은 아이의 주먹 쥔 손에 살포시 입을 맞추며 맹세한다.
너를 저 험한 곳에 홀로 두지 않겠다. 절대로 위험에 처하지 않게 하겠다.
라푼젤은 엄마의 사랑을 듬뿍 먹고 무럭무럭 자랐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고델이 가져다주었다. 책도 사다 주었다. 먹고 싶은 음식도 사다 주었다. 배우고 싶은 것도 배울 수 있게 독려해 주었다. 입고 싶다는 옷도 구해다 주었다. 그 모든 것을 다 해주느라 고델은 피곤했다. 가끔 잠이 들기 전에 거울을 보면, 폭삭 늙어버린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패인 주름과 희끗해진 흰머리를 만져보며, 잠시 헛웃음을 지어 보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흘러버린 시간을 탓하며 헛헛한 마음을 정리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오늘도, 내일도, 라푼젤을 위하여 할 일이 태산같이 쌓여있었다. 그래서 고델은 그 마음을 툭 덮어두고, 그냥 두통약을 한 알 먹고, 라푼젤이 좋아하는 동화책을 한 권 쥐고 그녀의 옆에 가서 매일밤 책을 읽느라 갈라지고 쉬어 터진 목소리로 맛깔나게 다시 한번 책을 읽어주었다. 아이가 잠들면 방을 청소하고, 내일 먹을 음식들을 손질해 두면 한 밤중이 되었다. 그제야 고델은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드디어 라푼젤의 키가 고델의 키만큼 커버렸다. 그즈음 되니 고델은 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오래전 아이를 업다가 삐끗한 허리는 아이를 위한 바쁜 일상에, 참고 견디다가 너무나 고통스러워 방문한 병원에서 결국 디스크 판정을 받고야 말았다. 어두운 밤에 어스레한 수면등 불빛에 기대어 매일 밤 책을 읽어주던 탓에, 남들보다 노안도 빨리 와서 이제는 안경을 끼지 않으면 책을 보기가 어렵다. 라푼젤이 창문을 보다가, 깜짝 놀라 고델은 부른다. 고델이 서둘러 라푼젤에게 다가간다. "저 풍등을 좀 봐요." 창문밖을 보니, 새까만 하늘에 풍등이 줄지어 떠오른다. 그러자 밤하늘에 노오란 풍등의 불빛이 마치 파도처럼 일렁인다. 라푼젤은 더욱 상기된 목소리로 어서 와서 저 풍등들을 보라고 손짓한다. 고델은 허리에 파스를 한 장 붙이고 어적어적 라푼젤의 곁으로 걸어간다. 풍등의 불빛이 번저서 보인다. 눈이 뻑뻑한 탓이다. 피곤해서 눕고 싶지만, 방실방실 웃으며 바깥세상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고 있는 그녀를 외면할 수 없어, 몰래 하품을 해가며 힘겹게 라푼젤을 향해 어색하게 미소 지어 본다.
고델은 이제 늙고 지쳤다. 매일매일을 언덕 위로 구슬을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처럼 보내야 했다. 이 일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의 쉬는 시간도 허락하지 않는 일상이 너무 힘겨웠다.
탑 안에서 부족한 것 없이 큰 라푼젤은 이제 바깥세상이 궁금해졌다고 했다. 고델은 기다렸던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창문에 큰 사다리를 놓아주었다. 라푼젤은 짐을 싸고, 웃으며 고델은 향해 손을 흔들고, 뒤돌아 힘차게 세상을 향해 나아갔다. 텅 빈 탑 안에서 고델은 라푼젤의 흔적을 정리했다. 언젠가 돌아올 그녀가 또 쉴 수 있도록 안락하게 방을 정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다가 옛 사진이라도 한 장 발견하면 소중한 보물처럼 사진을 껴안고, 잠시 라푼젤 생각을 했다. 위험한 바깥세상에서 철저히 분리하고 키웠던 그녀를 내가 지쳤다는 이유로 너무 빨리 세상에 꺼내두게 둔 것은 아닐까 생각하다가, 밤하늘에 무수히 떠오른 풍등의 불빛들을 바라보던 라푼젤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떠올리며 이내 고개를 젓고 다시 정리에 몰두했다. 어쩐지 속이 후련하기도 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움과 평온함을 동시에 느끼면서, 마음속 한 구석에서는 기묘한 죄책감도 조그맣게 피어났다. 고델은 미묘한 불편함을 못 느낀척하고 애써 눈을 감아, 고된 몸을 길게 눕혀, 오랜만에 깊은 잠에 들었다.
어느 날 밤 라푼젤이 사다리를 타고 다시 탑 안으로 들어왔다. 다시 만난 그녀의 눈빛은 이전에 고델이 알던 그 눈빛이 아니었다. 싸늘한 기시감이 느껴졌지만 반가움이 더 컸었기에 힘껏 안아주려고 다가섰지만, 공허한 눈빛으로 고델은 거칠게 밀어내고 입을 꾹 다문 라푼젤은 짐을 방 한쪽에 풀썩 집어던지고는 침대로 기어들어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드러누워 버렸다.
고델은 불안함에 잠을 한숨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대로 밤을 새워 몽롱한 정신으로 아침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라푼젤을 불렀지만, 그녀는 그 어떤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방문을 열어서 이름을 부르니 울부짖는 짐승처럼 소리를 질러대는 바람에, 흠칫 놀라 문밖에 서서 한참을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떨리는 손으로 끼니를 방 안으로 밀어 넣으며 발걸음을 돌린 고델은 하루 종일 라푼젤을 걱정하느라 아무 일도 손에 잡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렇게 상처를 입었을까. 부드럽게 물어보았지만. 라푼젤은 그저 소리 지르며 고델은 밀어낼 뿐이었다. 고델의 마음속에선 오래전 외면했던 조그맣게 피어난 죄책감이 이제 불길한 꽃봉오리로 자라나고 있었다.
"내가 너무 일찍 탑밖으로 너를 내보낸 것이 아닐까?"
늙고 지친 고델은 매일 같이 그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제는 그 생각을 비료 삼아 기괴하고 흉측스러운 꽃으로 기어이 피어나고야 만 죄책감을 품에 안고, 괴로움에 몸서리치며 그저 탑 안에서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무슨 짓을 해도, 라푼젤은 그녀 안의 세상에서 벗어나질 않았다.
간절히 노력해서 불러낸 라푼젤은 또 고델은 힘들게 만들었다. 기껏 밖으로 나와서는 고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거친 말들을 마구 해 댔다. 고델은 견딜 수 없어 같이 화를 내 보았지만, 그 일은 라푼젤의 마음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보내버리는 일이 되고 말았다. 둘은 이제 완전히 끝난 사이처럼, 서로를 못 본체 했다. 눈을 마주칠 때마다 서로가 만들어낸 마음의 상처가 계속해서 덧이 나 피가 철철 흐르는 듯했다. 그렇지만 고델은 어두운 밤이 되면 일어나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살짝 라푼젤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 한참 동안 잠든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시 침대로 돌아가 잠을 청하고는 했다. 가끔, 풍등이 다시 그 노오란 빛의 파도를 밤하늘에 일렁이게 만들면 눈물이 자꾸만 흘렀다. 혹여 라푼젤에게 들릴까 봐 소리를 죽여 몰래 흐느꼈다. 그렇게 서로를 상처 주고 상처 입히는 시간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어지러운 소파에는 오래전 아이와 같이 봤던 디즈니 영화 라푼젤 DVD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아이가 아주 어릴 적, 작은 손을 꼬옥 잡아 가슴팍에 품고 버터향내음 가득한 마트표 팝콘을 전자레인지에 튀겨 양푼에 대충 쏟아 바닥에 후드득 흘려가면서 깔깔거리고 웃으며 봤던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
라푼젤이 풍등을 바라보며 노래를 부를 때는, 아이의 눈에도 그 풍등이 비쳐서 노란 파도가 그 작은 눈동자에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사랑스러운 작고 포동한 볼 가득 우물우물 팝콘을 물고서는, 라푼젤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사방팔방 튀는 팝콘을 휴지로 집어 주워 들고 남은 손으로는 아이를 안아 들고 더듬더듬 멜로디에 의지해서 같이 따라 부르곤 했다.
떠오르는 추억과 상념들을 주체하지 못한 엄마는 혼돈스러운 상황을 억지로 정리해보려 하다가,
이 모든 것이 악몽 같은 꿈이었음을 깨닫는다.
고델은 라푼젤의 머리카락으로 영생을 얻길 원했다.
엄마는 아이의 머릿속에 영어가 들어가길 원했다.
그래야 아이가 행복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델처럼 아이를 탑에 가두었나
가두고 아이가 원하지도 않는 원하는 것들을 들이부었나
아이는 엄마를 사랑해서 억지로 꾸역꾸역 행복한 척을 했다.
고델은 다 알고 있었지만, 엄마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이 엄마는 본인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미래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조차도 몰랐다. 아이를 돌보느라, 그런 것들을 깊이 생각해 볼 시간도 없었다. 그저 남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는 말만 믿고 아이를 탑 안에 가두었다. 자신이 앞으로 갈 길도 어디인지조차 모르는 주제에, 어떻게 감히 앞장을 서서 딸을 이끌어 줄 생각을 할 수가 있었을까. 엄마는 한없이 무능한 자신을 탓하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내가 무얼 안다고, 세상을 내 마음대로 차단하고 아이를 가두어 키웠을까. 그것이 엄마는 사랑인 줄 알았었다. 그렇게 끌어안고 있다가 내가 지쳐서, 내 멋대로 아무런 준비 없이 세상에 내보낸 딸아이는 매 시간 매 순간 할퀴어지고 있었다. 상처 입는 아이를 바라보기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어차피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기다려야 했다.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너무나 끌어당겨 안고 싶어도 손을 내밀지 조차 말아야 하는 시기가 바로 지금임을 알아버리게 되고 말았다.
멀리 서서 닫은 방문에 새어 나오는 불빛을 바라보며 새어 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딸아이는 잘하고 있었다. 내가 없어도. 내면의 상처에 스스로 고른 약을 바르고 있었다. 혼자 그림을 그리고, 바깥과 충분히 소통을 하면서 고통스러워도 참고 본인의 인생을 끌어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탑에 가두지 않고 키웠어도. 내 딸은 충분히 잘 자랄 수 있었다. 이미 그녀는 나보다 더 영리하고, 현명하고, 강하고 멋진 사람이었다. 그녀가 앞길에 대해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좌절하고 힘들어하는 그 모든 과정을 감내해 갈 때, 엄마인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오직, 그저 가만히 지켜보며 옆에 있어 주는 것뿐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기다리는 지리한 시간 동안, 그녀의 고통을 내 것처럼 같이 느끼며 그보다 더한 괴로움에 몸서리쳐지고 그것을 외로이 견뎌내는 것, 상처받고 아파하는 그녀를 보면서 내밀고 싶은 손을 애써 거두는 것, 그 행동이 바로 내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딸아, 네가 이 글을 언젠가 보게 된다면.
엄마가 잘 몰라서 네게 한 모든 일들에 사과를 할게.
엄마는 잘 몰라. 하나도 몰라.
그래서 많이 불안했단다.
그렇지만 나는 너를 믿어 보기로 했단다.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고 네 힘으로 창문에 사다리를 놓아 세상을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너에게 있음을 이제는 믿어 의심치 않기로 했단다.
엄마는 이 마음이 사랑이라고 굳건히 믿기로 했단다.
-그래도 그 시간이 네게는 행복이었다고 말해주는 다정한 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