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일요일들

인생은 디자인하는 대로

by 소월
" 생각하는 쪽으로 삶은 스며든다 "
은희경 작가의 <생각의 일요일들> 중에서




번아웃이 크게 왔다.

끝이 보일 것 같지 않은 터널을 지나 이제 땅굴을 파 볼 차례이다. 끝나지 않는 고뇌와 지침은 무조건 내려놓고 쉬어야 한다고 말한다. 활활 타올랐던 열정은 금세 꺼져가는 촛불처럼 희미해져 갔다.

인생이 계획한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다는건 이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을 다스리는게 그리 힘들지만은 않았다. 방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을거야. 일단 쉬었다 가는게 좋겠다.


지쳤던 자아들이 차츰 기지개를 켤때쯤 이제야 주변의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노트북을 켰다. 포트폴리오를 살펴보며 보완책을 떠올렸고 대략 기간을 잡았다. 계획보다 시간이 더 걸릴 거라는걸 염두에 두고 일단 메모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아직 더 쉬고싶었기 때문에 잠시 눈을 돌려 다른 일에 집중했다.


어느날 부터인가 재능기부를 하게 되었는데 어쩔땐 정서불안이 의심될 정도로 한시도 가만히 있는걸 좋아하지 않는 나로선 군가에게 재능을 나누는 일이 나의 작은 자아를 발견하는 보수로 돌아왔기 때문에 즐거운 일상으로 자리잡았더랬다.

행복의 기준은 너무도 다양한 잣대로 각각의 생각에 맞게 갖다 붙이면 되는 것이므로 난 이것을 '내 작은 소소하고 행복한 작업'이라고 칭했다.


디자인을 하면서 수정작업을 반복하고 완성을 냈을 때의 기분이란 공연장 거의 앞자리 중앙에 앉아 좋아하는 가수와 아이컨텍하며 그의 목소리에 심취해 온몸에 전율을 느꼈던 설레임과 매우 흡사하다.

무에서 창조해내는 유의 세계는 그야말로 경이로움 그 자체다. 마치 써내려간 글을 수없이 많은 퇴고의 과정을 거쳐 완성해낸 '완성된 글'로 만났을 때 처럼 말이다.

디자인과 글을 쓰는 일은 그런면에서 조금 닮아있다.


그리고 가장 아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단연 고사양 노트북과 디자인 소프트웨어이다. 노트북은 사실 남편이 쓰던 것이였는데 한 장비병하는 남편의 노트북은 내가 디자인을 하기에 최적의 스펙을 자랑하고 있었다. 일에 대한 열정을 내비친 후론 데스크탑 대신 그 노트북이 내 것이 되어 있었다.


디자인 소프트웨어는 블랙프라이데이때 이벤트가로 구입해 정기결제를 하고 있는 덕분에 매번 최신 소프트웨어로 업그레이드되어 사용할 수가 있다. 시 기술의 진보는 문명사회의 1등 공신이 아닐수 없다.


미쳐 수습하지 못한 땅굴에 흙을 덮고 이제 막 터널밖을 여행할 계획을 세우는 중이지만 곧 찾아올 설레임과 열정만이 날 반겨줄 차례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지금의 쉼이 정말 '편하게 쉬어가는 시간'이다. 가끔 머리속을 텅텅 비워버리고 새로 리셋하는 일도 필요한 법이니까.


언젠가 폭풍우같았던 암흑기가 지나가고 잎들이 흩뿌려진 길을 밟으며 무지개빛 하늘을 맞이하게 된다면 아마도 지금의 흑백사진은 몇백만 화소의 높은 컬러 해상도를 자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어차피 늦깎이 인생 급할 것도 없다. 천천히 차근차근 그러나 제대로 단단히 가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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