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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기타 Sep 12. 2023

부르지 못한 노래

애비

   조카의 상견례 소식을 형님이 알려왔다십여 년 전부터 엄마의 빈자리를 대신해 아빠를 챙기며 집안 살림을 언니와 분담해 온 심성 착한 둘째다형수님이 안 계시는 처지라 형님을 볼 때마다 조카의 혼사가 늘 걱정스러웠다다행히 교제 중인 남친이 지방 근무를 마치고 서울로 복귀하자 부모님이 청하여 상견례 날짜가 정해진 것이다축하 겸 혼사 의논을 위해 형님 집에서 저녁을 하기로 했다혼자된 세월만큼 자식 수발에 음식 솜씨가 백종원 셰프 버금가는 형님이 월계수 잎을 넣어 삶아낸 수육을 준비한다기에 가는 길에 제철 생선회 한 접시를 떠 형님 집으로 향했다저녁을 먹으며 상견례와 혼수 얘기를 나누었다예단 품목은 누님이 정하고 하객 맞이 역할과 비용 분담을 정하고 예단과 함께 보내는 서찰은 내가 맡기로 했다반주 삼은 매실주 몇 잔에 제법 얼큰하고 알싸한 기분으로 식사를 마칠 무렵 형님이 노래방에 한 번 가자고 했다

  조금 전 식사 중에 요즘 결혼식 풍속이 언급되었다예전과 달리 주례사와 축가도 부모님과 신랑 신부가 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그 얘기 중에 형님이 내가 축가를 부르게 되면 「애비」란 노래를 하고 싶다라고 했다비슷한 연배인 그 가수의 노래 몇 곡을 알고 있으나 그 노래는 생소하였다한두 곡 차례가 돈 다음 형님이 그 노래를 선곡했다화면에 나오는 노래 가사를 보는 순간 형님이 왜 그 노래를 부르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식의 결혼을 앞둔 부모의 심경과 딸을 떠나보내는 아비의 마음을 이처럼 절절히 담아낸 노래가 또 있을까 싶었다가수의 연륜만큼이나 탁한 목소리로 담아내는 노랫말이 바로 형님의 마음이었다비록 마음만큼 다해주지 못했으나 지난 십여 년 세월 동안 홀로 딸을 건사하다 이제 내 곁에서 떠나보내는 아비의 마음을 전하고 싶은 것이 형님의 마음임을 안 순간 먹먹해졌다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 노랫말과 그 노래를 부르는 형님의 모습이 머릿속을 맴돌았다형님 성품과 노랫말 그리고 지난 세월 형님의 삶을 생각하면 과연 그 노래를 끝까지 담담하게 불러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다정다감하다자상하다살갑다라는 표현과는 거리가 먼 형님이다속정은 깊을망정 겉으론 투박하며 나름의 굴곡 많은 삶을 살아온 형님이다남에게 베풀길 좋아하나 여건이 따라주지 못하는 노후의 삶이기에 마음껏 해주지 못하는 딸에게 미안하고 아쉬운 마음이 컸을 것이다그럼에도 딸자식의 행복을 염원하는 아비의 마음을 노래에 담아 전하고 싶었던 형님의 마음이었다.

  결혼하는 딸의 행복을 염원하는 마음을 노래에 실어 담담하고 구성지게 부른다면 하객들도 아비의 마음을 잘 담아낸 노랫말에 공감하며 결혼식의 한 장면으로 지나갈 것이다그러나 형님의 성품과 저간의 사정을 알기에 끝까지 담담하게 불러낼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는 회의적이었다새로운 출발을 축복하는 자리가 눈물지고 마음 짠한 결혼식이 되는 것은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결혼식까지 불과 한 달여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우선 그 노래를 익혀두기로 했다만일 우려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혼주석 바로 뒷자리인 가족석에 앉아있으니 얼른 형님의 마이크를 넘겨받아 노래를 이어 불러 상황을 수습해 버리자는 심산이었다혼주 가족으로 결혼식을 원만하게 진행되도록 해야 할 의무도 있고또 형님보다 한결 담담하게 노래할 수 있을 것이며 모양새도 과히 나쁘지 않으리라나 또한 신부의 작은 애비가 아닌가.     

  불러본 횟수가 족히 쉰 번은 넘었으리라어느 정도 노래를 익혔을 무렵 함과 예단이 오가고 그 며칠 후 다시 형님 집에 모였다지방에서 오는 친지와 하객 응대 등 이런저런 얘기 끝에 형님에게 축가를 어찌할 거냐고 슬쩍 물었다딸의 행복을 바라는 아비의 마음을 전하고는 싶으나 사위가 축가를 부른다고 하니 굳이 장인까지 나서야 할 필요가 있나 싶어 고민 중이라 했다조카의 의향도 물어보니 신랑이 준비한 축가가 있으니 굳이 아빠가 안 해도 된다고 했다속으로 하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성악을 전공한 사위가 제 체격만큼이나 크고 우렁찬 목소리로 불러제낄 '사랑의 세레나데'에 비하면 형님의 노래는 트로트’ 소위 '뽕짝'이다노래의 품격에 있어 비교하기가 좀 그렇다. ‘이건 영 아닌데애지중지 기른 딸을 데려가는 것도 한편으론 괘씸(?)한데 노래마저 압도를 당한다내가 얼마나 딸을 아끼는지 노래를 잘 듣고 내 딸에게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뼛속 깊이 심어주려 했는데 하필 성악을 전공한 녀석이 직접 축가를 한다니 이건 좀 아닌데.’ 아마도 이런 생각 때문에 망설인 것으로 짐작되었다.

  결혼식 당일신랑은 당당한 체격에서 뿜어 나오는 우렁찬 목소리로 도무지 뜻을 알 수 없는 무슨 사랑의 세레나데인가를 열창해 열렬한 박수와 환호를 받았고장인어른의 심중은 알 바 없다는 듯 특유의 서글서글아니 능글능글한 표정으로 하객들의 환호에 여유 작작의기양양했다그런 신랑의 모습에 아비의 심중을 헤아릴 겨를이 없는 신부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신랑만 바라보았고혼주석 뒷자리에 앉아있던 나로선 그때 형님의 표정이 어떠했는지를 볼 순 없었지만그 마음은 짐작할 수 있었다     

  얼마 전 형님 집에서 조카 부부와 저녁을 함께 했다출산을 앞두고 있어 배가 많이 불렀고 이젠 아기의 발길질에도 익숙하다고 했다. ‘아기를 생각해서라도 잘 먹어라.’ 했더니 둘 다 야식을 자주 시켜 먹은 탓에 체중이 많이 늘었다며 마주 보며 웃는다그런 모습을 보며 그때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을 마음속으로 다시 되뇌어 본다. ‘그래라그리 재밌게 살려무나신혼도 한때이고 인생도 그리 긴 게 아니더구나사는 동안 서로 토닥이며 오누이처럼남매처럼 오순도순 살아가려무나효도란 게 따로 없다너희 둘이 재미나게 살아주면 그게 바로 효도가 아니더냐지금처럼 서로 아껴주며 재미있게 살길 바란다다만 한 가지축가로 「애비」를 부르려 했던 아비와 장인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또 혼자 오만가지 쓸데없는 생각을 다 해가며 한 소절도 부르지 못한 노래를 목이 쉬도록 연습한 작은 아비의 마음도 조금은 알아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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