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근무지 대표회장의 부음 소식을 접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의 빈소를 찾아 생전의 사람 좋은 모습 그대로인 영정 속의 얼굴과 마주했다. 폐암 3기의 선고에 투병 생활 4년, 15K의 체중 감소와 20여 차례의 항암 치료 중에도 완치에 대한 자신감과 강한 의지를 보였던 그였다. 근무지를 올긴 후에도 전화, 문자로 안부를 나누었고 한 달 전쯤, 언제 한번 볼 수 있느냐는 문자에 입원한 병실의 사진을 답변 대신 보내왔었다. 전에도 간혹 그런 적이 있었기에 잠시 검사나 잔여 치료를 위해 입원한 것으로 알았으나 그게 마지막 교신이었다. 폐렴 합병증을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천주님 곁으로 간 것이다.
3년 연하인 그를 만난 것은 단지 부임 후 1년이 지나서였다. 부임 당시 상수도 급수관 교체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이와 관련한 내부 갈등이 있었다. 즉, 관련 절차에 따른 업체 선정 전에 이미 특정 업체가 내정되었다는 소문대로 그 소문의 업체가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 일로 의혹의 당사자인 대표회장과 대표자 간의 언쟁이 회의 때마다 발생하였고 단지 내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조율하며 대표자 회의를 이끈 사람이 여성인 K 감사였다. 현직 요양병원 부원장인 K감사는 조직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대표자 간 의견 충돌 시마다 이를 조정, 봉합하는 역량을 곧잘 발휘하였다. 그녀의 임기 종료 전, 향후로도 그런 역할을 담당할만한 분을 후임자로 추천 부탁했고, K 감사가 추천한 사람이 고인이었다. 40여 년을 학교의 행정실장으로 근무하고 퇴직한 고인은 학교 건물, 시설관리를 위한 많은 공사를 총괄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관리소장이 취약한 부분을 많이 보완해 주었다. 지역 성당의 사목회장으로 봉사 중이었고 퇴직한 후에도 그동안의 신임으로 학교 측의 여러 자문에 응하고 있었다.
그가 대표자로 합류한 때의 대표회장은 일부의 이견이나 불만에 민감한 성품으로 의사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발생했다. 모두가 만족하는 의사결정이란 사실상 불가능하거나 쉽지 않다. 상황에 따라 리더십의 발휘가 필요했으나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경우 그가 나섰다. 그는 단지와 전체 입주민 편익을 기본으로 했다. 그런 모습에 차기 회장감이라는 생각을 했고 기대한 대로 차기 대표회장이 되었다. 회장이 된 후 장기수선계획 사업의 우선순위를 다시 정하고 주민 동의를 얻었다. 회장 재직 중에는 공사 현장을 수시 방문하여 진행 상황을 직접 눈으로 점검하고 미흡한 점은 지적 후 보완을 요구했다. 그가 함께한 6년간 집행한 공사금액만도 30억이 넘는다. 지자체 지원사업, 한국전력, 서울시 등의 지원사업 응모는 기본이었고 수백만 원에 불과한 지원사업도 신청하여 단지 시설 개보수 및 경비, 미화원 복지시설 개선에 보탰다.
승강기 교체공사 후 변압기 용량 증설, 옥상 방수, 오·하수관 교체, 건물 균열보수 및 재도장공사 등 많은 공사를 했음에도 구설수나 이렇다 할 잡음이 없었다. 그의 사심 없고 맑은 성품 덕분이었다. 그런 성품을 대표적으로 보여준 일화가 있다. 대표회장이 된 후, 새로 선정된 용역업체 대표자가 인사차 방문하여 내미는 봉투를 일고의 망설임 없이 담당 업무를 충실히 해주는 것으로 대신하라며 거절하였다. 그런 대표회장과 호흡이 잘 맞았다. 연중 지속되는 공사 관리로 몸은 다소 고단했으나 마음은 편했다. 그런 대표회장과 일을 하는 것도 드문 기회라 생각했다. 과거 상수도 급수배관 교체공사와 관련한 잡음과 내부 균열이 있었음을 알기에 모든 공사, 업체 선정 과정을 법규준수를 기본으로 투명한 관리문화 정착에 정성을 기울였다.
단지 내 공사에 대한 입주민의 시선은 각양각색이다. 부임 후 처음으로 시행한 작은 규모의 공사 때도 관련 업계에 종사한다며 참견하는 주민이 있었다. 10억이 넘는 승강기 교체공사 때에는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품질 시공을 최우선으로 하고 모든 공정을 공개하여 불필요한 억측이 없도록 유의하였다. 의혹의 시선으로 찾아와 관련 서류를 보여달라던 주민도 있었으나, 확인 후에는 아무 말 없이 돌아갔다. 대표회장의 첫 임기를 마치자 그와 함께 일한 대표자들과 그를 신뢰하는 주민들의 요청으로 한 번 더 회장직을 맡았다. 누구보다 그의 사심 없는 생각과 단지를 위하는 마음을 알기에 매년 말 구청의 단지발전 유공자 표창 대상자로 그를 추천했다. 관리소장이 대표회장을 표창 대상자로 추천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으나, 그 누구보다 단지발전을 위해 사심 없이 봉사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와 함께 일한 6년은 맑고 투명한 관리체계가 정착된 모범적 사례였다. 모든 공동주택이 우리 아파트처럼 운영되고 관리된다면 살기 좋은 아파트가 될 거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대표회장과 관리주체를 대하고 바라보는 입주민의 말과 눈빛에 신뢰가 담겨 있음도 뿌듯하였다. 그와 함께 하는 동안 ‘우수 관리 모범 단지상’ 3년 연속 수상, 이웃 주민 참여 하의 ‘5월, 사랑과 감사의 편지 쓰기 대회’의 성공적 개최, 총 30억 원이 넘는 금액의 공사를 집행했음에도 의혹과 잡음이 없었던 점, 업체와의 관계도 갑을관계가 아닌 동행관계(협력자)로 대하였기에 그들 역시 최상의 품질, 최선의 서비스로 화답해 온 점 등은 그와 함께 일궈낸 결과물로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업적이며 자긍심으로 남아있다.
3년여의 투병 생활을 잘 견뎌내던 그의 부음 소식에 '참 아까운 분인데….‘ 하는 마음이 제일 먼저 든 것은 그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아쉬운 점은 그가 공들여 쌓아 올린 그런 단지 관리문화를 이어받지 못한 지금의 단지 상황과 소식을 접할 때마다 씁쓸한 표정을 지을 그의 얼굴이 떠올라 못내 안타까운 마음이다. 비록 생전의 그 모습과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없으나, 그의 신념의 원천인 성서의 교리에 따라 충실한 삶을 살았기에 지금은 성모님의 보살핌으로 평안을 누리고 있을 것임을 믿는다. 나 역시 관리소장 경력의 절반 이상을 보낸 그곳에서의 추억을 떠올릴 때마다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는 건 그와 함께 한 덕분이다. 아침저녁 한기를 느껴지는 늦가을에 그의 넉넉하고 사람 좋은 모습이 생각나는 것은 단순히 계절 탓만은 아니리라.
고 이용재 회장의 안식과 영면을 기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