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애기타 Feb 02. 2024

라떼 할아버지 이야기 3

라떼 할아버지 관리소 습격 사건 

   혹시나 하고 우려했던 일이 기어코 벌어졌다. 명절을 앞둔 시점이라 연휴 동안 단지 관리에 특별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시설관리, 경비, 미화 분야별로 신경 써야 하는 일에 대한 점검 및 이행을 당부하는 일이 요즘 아침 미팅의 주된 내용이다. 회의 중 걸려온 전화에 짧은 응대를 끝낸 경리 주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할아버지가 관리소에 간다며 지금 세면 중이니 소장님에게 알려드리라는 할머님의 전화였다. '기어이 올 것이 왔구나' 했다. 라떼 할부지가 기어코 소장 사직을 직접 확인하러 관리소를 기습적으로 습격하실 모양이다. 의심쟁이 영감님 같으니라고, 소장이 그만둔다면 그런 줄 아셔야지…. ‘소장이 하늘 색깔이 빨갛다면 그때부턴 무조건 빨간색이야’ (영화 'No. 3') 했던 송강호 님이 소장이었다면 할부지 혼쭐이 났을 거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인가. 5,000번이 넘는 외침을 민족 특유의 '은근과 끈기'로 이겨낸 조상의 후예이고,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최단기간에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을 이룩한 위대한 국민이 아닌가? 게다가 2차 대전 당시 군사정보를 빼돌려 연합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힌 전설적인 스파이 '마타하리' 뺨치는 우리 편 '마타하리' 아니 '할매하리'를 비밀리에 심어 두지 않았는가! (비록 칠십 중반이긴 해도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적군의 작전계획을 정확히 탐지하여 미리 알려주는 007 제임스 본드와 필적할 만큼 첩보원 역할을 이리도 완벽하게 수행하는데 말이다.) 또한, 혹시나 있을지 모를 이런 상황에 대비하여 전편에 언급한 바와 같이 제갈공명도 탄복할 작전을 이미 수립해 놓았다. 전화받은 시간과 할아버지 관리소 도착 예상 시간을 계산해 보니 최소 십 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즉시 비상령을 발동하고 작전 일 단계 '코드 원'을 하달했다. 

    

  요즘 선거를 앞두고 정치판이 요란하다.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언행이나 처신으로 ‘우리나라에도 저런 훌륭한 지도자감이 있었구나’ 하는 위안이나 자부심을 주기는커녕 지들끼리 진흙탕 싸움에다 막장 언행으로 서로 헐뜯기만 해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자기 진영에 불리하면 그건 가짜 뉴스네 뭐네하고 발뺌하기 바쁘고…. 이들 세계는 아군도 우군도 적군도 없는 것인지 같은 편인 줄 알았더니 같은 당 후보자끼리도 서로 물고 뜯고 하는 볼썽사나운 일들이 매일 같이 벌어지고 있다. 저런 아귀다툼 끝에 누구 말대로 별의 순간이 아니라 별로 탄생한들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다.(3년 전의 글인데 정치판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네요) 가짜 얘기를 꺼낸 것은 하도 쏟아지는 가짜 주장에 잠시 눈과 귀가 현혹된 탓도 있고 또 저 북쪽에 골치 아픈 남매가 지들 맘대로 나라를 결딴내고 있는 곳이 한 군데 있다. 못된 짓을 골라 다하면서 참수 작전 또는 드론 공격이 두려웠는지 가끔 대역을 썼네, 마네 하는 추측성 기사를 본 적이 있었기에 관리소장 사직(가짜 사직) 언급과 함께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대역 소장 즉 가짜 소장을 염두에 두게 된 것이었다. 

  작전 4단계 중 1단계인 '코드 1'의 핵심 내용이 가짜 소장 즉 소장 대역의 배치였다. 즉시 가짜 소장역을 담당하기로 한 주임에게 십 분 내로 입고 있는 작업복을 출퇴근 복장으로 갈아입고 소장 자리에 앉아 대기하라는 긴급 명령을 하달했다. 관리소 합류 후 지난 백일 가량을 호흡을 맞춰온 수명 받은 주임의 눈에는 번뜩이는 결기가 보였다. 마치 백척간두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결단코 구해 내고야 말겠다는 구국의 결단이 서린 그런 눈빛이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리 보였다.      

  그 옛날 황산벌 오천 결사대의 눈빛과 6.25 전쟁 시 밀려오는 적 탱크를 저지하여 무너진 전선을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고자 폭탄을 안고 적의 탱크로 돌진한 육탄 12 용사의 눈빛이 저 눈빛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아들이 병장으로 군 생활을 마친 그 부대다) 그런 눈빛을 읽었기에 저으기 안심되었으나, 그래도 확인 차원에서 '너무 친절하게 응대하지 말고, 지극히 사무적으로 대해야 한다.' '코드 2'의 핵심 사항을 환기시켰다. 알아서 잘할 테니 염려 붙들어 매시라는 가짜 소장의 믿음직한 말에 마음이 그리 든든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야 가미카제 특공대에게 하사했다는 천황주 격으로 빨간 뚜껑 소주라도 한잔 권하며 격려하고 싶었으나, 재임 중 '근무시간 중의 음주는 절대 금한다.'라는 나름의 제1호 공약을 깨트릴 수 없기에 남자 간의 눈빛으로만 마음을 주고받았다. 작전 개시 5분여를 앞두고 굳은 악수와 말 없는 눈빛으로 임무 완수를 다짐하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관리소 문을 나섰다. 덕주(낙랑?) 공주의 섬섬옥수를 뿌리치고 금강산으로 입산했던 마의태자의 마음이 이랬을까? 경리 대리에게 라떼 할부지 입실 후 퇴실까지의 진행 상황을 수시로 알려달라는 당부는 당근이었다.


  ‘자, 이젠 어디로 가야 하지?’ 김경남 님의 '님의 향기' 노래 가사처럼 관리소를 나섰으나 막상 갈 곳이 없었다. 관리소 담벼락에 붙어 있거나 뒤편에 웅크리고 있기도 그렇고 (내가 뭘 잘못한 게 있다고...) 관리소 앞 동의 옥상으로 올라갈까, 아니면 단지 밖으로 한 바퀴 돌고 올까 하다 결국 지난 도색공사 후 남은 페인트의 쓰임새가 생겼기에 재고 파악 겸하여 지하창고에 들렀다. 재빨리 확인한 다음 관리동으로 향하는 쪽문이 잘 보이는 곳에 주차된 승합차(유리창이 짙은 색으로 코팅 처리된 차량) 뒤편에 몸을 은폐하고 라떼 할부지의 등장을 지켜보기로 했다. 잠시 후, 관리동의 쪽문으로 라떼 할부지가 우리 편 '할매하리'의 부축을 받으며 한 걸음 한 걸음 관리소로 향해 오는 모습이 보였다. 급히 무전기 아니 핸드폰을 꺼내 관리소에 알렸다. '여기는 소장, 관리소 나와라, 오버. 지금 할부지가 나타났다. 1~2분이면 관리소에 도착할 것이다. 그쪽 상황은 어떤가, 오버' '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걱정 붙들어 매셔도 좋다, 오버'.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과 같았다.) 이런 찰떡궁합이 어디 있을까? 이런 위기 상황을 맞이하고도 침착한 대역 소장, 생수 한 컵을 미리 따라놓고 만반의 대비를 하는 아가씨(경리 대리)가 그리 든든할 수 없었다. 라떼 할부지와 우리 편 ‘할머니 하리’가 관리소로 진입하는 모습을 확인 후 퇴각할 때까지의 이십 여 분은 시간이 더디게 갔다. 10분쯤 경과 후 전화로 '지금 그쪽의 상황은 어떤가? 아군의 부상자는 없는가?' 등을 확인하고 웬만큼 시간이 흘렀다고 판단될 무렵 두 번째 전화로 경리 주임에게 '대표회장께서 소장님을 급히 찾으니 빨리 가보셔야겠다'라고 가짜 소장에게 전하라 하여 언제 끝날지 모르는 라떼 할부지의 천방지축 공세를 무력화 내지 초토화(?) 시켰다. 지금 생각해도 절묘한 타이밍에 기가 막힌 전술이요 완벽한 작전이었다.

  결국, 대역 소장의 부축과 배웅을 받으며 관리소를 나서는 할부지의  나름 흡족한 표정으로 지나가는 모습을 차량 너머로 확인한 후 관리소로 복귀했다. 관리소에 들어선 순간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우리 대역 소장님이 소장 근무복 차림에 못 보던 검정 뿔테 안경까지 쓰고 있었다. 거기에 언제 그리 꾸밀 시간이 있었는지 늘 보았던 모자에 눌러진 머리 모양 대신 빗질로 다듬은 듯 단정한 머리에 2:8 비율의 가르마까지 하고 있었다. 그대로 관리소장 자리에 눌러앉아도 진짜 소장보다 훨씬 잘 어울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직원들과 호흡이 잘 맞는다는 게 이런 게 아닐까! 수고하셨다 하고 뭐 특별한 일이나 말씀은 없었느냐 했더니 '들었던 대로 늘 하셨던 말씀을 하신 것 같고 이름이 뭐냐고 해서 말씀드렸더니 이름이 참 좋다'는 말씀 외에 특별한 말씀은 없었다고 했다. 민원 현장으로 복귀하는 가짜 소장에게 ‘가짜 소장님, 수고했습니다’ 하고 아가씨(경리 주임)에게 할부지 레퍼토리에 뭐 달라진 게 없더냐고 물었다.


  '소장 잘 바뀌었다'라고 하셨단다. 이런 된장! 뭐 이런 할부지가 다 있나! 아니 지난번 전화로는 소장은 좋으니 짜장면 사준다고 아가씨랑 같이 집으로 오라고 그리 말씀하신 장본인이 아닌가. 며칠이 지났다고 소장 잘 바뀌었다니! 세상에 믿을 할배 없다더니 그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지경이었다. 당장, 이 영감님을 뒤쫓아가서 아니 아무리 치매 기운이 있으셔도 어찌 그런 말씀을 다 하실 수 있냐고 따질까 하다 우리 정보원 할매하리를 끝까지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참을 인(忍) 자 셋이면 살인도 피한다'라는 속담 및 타고난 천성이 착한지라 그냥 참기로 했다. 그래도 쉬 분이 덜 풀려 '에라, 이 할부지야. 무슨 할배가 입에 침이 마르기도 전에 어찌 그리 한 입으로 두말을 할 수 있어요? 지난번 하신 말씀은 마음에도 없는 립 서비스 아니면 정치적 수사에 불과했나요? 정치판에 난무하는 가짜 뉴스 공방에 한 수 배우셨군요.' 하며 혼자 구시렁거렸다. 


  무슨 이런 일을 다 겪어야 하나. 대체 소장인 내가 뭘 잘못했나? 코로나 감염 예방 차원으로 정자에 오래 계시지 말고 댁으로 가시라는 말도 할부지 보호 차원이었고, 과장이 말했는데 내가 왜 라떼 할부지를 피해야 하나? 일이 어디에서 무엇부터 잘못 꼬였는지 이번 추석 연휴 동안 깊이 생각하면 답이 나올까?    

  미국 제33대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이 재임하는 동안 집무실 책상 위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힌 명패가 있었다고 했다. 'The buck stops here.' (모든 책임은 여기서 멈춘다. 즉 모든 책임은 대통령이 질 테니 소신껏 일하라) 나름 멋진 말이다. '공(功)은 침소봉대, 앞질러 자화자찬, 과(過)는 묵묵부답, 묵언수행'으로 일관하는 그들과 비교하면 말이다. 연휴 기간 중 나무판자 하나 주워 '모든 책임은 소장이 질 테니 소신껏 일하시오! '이렇게 새긴 명패 하나 만들어 갖다 놓으면 과연 그 뒷감당이 될지 모르겠다. 라떼 할부지와 3라운드는 여기까지로 부디 이번 라운드로 끝나길 소망하나 누가 알 수 있을까? 단지 순찰 중 무심결에 정자 앞을 지나다 할부지와 '조우'나 '해후'를 한다면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고 생각조차 하기 싫다. 사람의 일이란 알 수가 없다. 만나게 될지 아니면 남은 재임 기간 중 한 번도 만나지 않고 찾아오지도 않는 그런 행운을 누릴지…. 


  경건한 마음으로 두 손을 모은다. “라떼 할부지야, 작년에 시작한 '코로나 투쟁기' 완결판으로 7편을 마무리해야 하고 올해 의미 있었던 '사랑과 감사의 편지 쓰기 대회' 후기도 아직 마무리하지 못하고 있는 점 등을 참작하시어 당신께서 주인공인 '라떼 할부지' 편은 부디 이번 3편으로 끝나게 해 주시면 좀 안 될까요. 밀린 글을 마무리하려고 진즉 마음먹고 있었으나, 이런저런 일에 치이고 할부지 이야기도 1편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3편을 쓰고 있는 이 현실이 이게 말이 됩니까? 이제 관리소에 그만 오시고 혹 단지 내에서 만나더라도 모른 척해주시면 안 될까요. 또 관리소에 찾아와 진짜든 가짜 소장이든 간에 직원들 앞에서 혼자만 신난 그놈의 '알쓸신잡' 강의도 제발 그만해주시면 안 될까요? 만일에 '라떼 할부지 시리즈'를 4편까지 써야 하는 불상사가 생긴다면…, 이름이 참 좋다고 하신 그 가짜 소장을 진짜로 만들어 버리겠습니다. 아시겠어요”


 지금 쯤 정자에서 쉬고 있을 라떼 할부지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번진다. 마치 내 기도에 답이라도 하는 듯했다. 할부지의 야릇한 미소의 의미가 무엇인지 최신 AI 암호해독기에 넣고 판독을 해보았다. 암호해독기 화면에 판독 결과가 떴다. 할아버지 미소의 의미 : 그리하면 나야 좋지, 난 바뀐 소장이 더 좋아. 

'아이쿠야! 진짜 소장 입에서 터져 나온 비명소리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라떼 할아버지 이야기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