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코의 ‘새삥’ 아님 주의
삥 뜯기다: 돈을 빼앗기는 것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과거의 일상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한다.
나는 고등학생 때까지도 삥을 뜯겼다.
이건 나름 부모님한테도 걱정거리였는지 고등학교 1학년때 장래가 궁금해 신점을 보러 갔는데 엄마가 내가 언제까지 삥을 뜯길지 물어봤었다.
그랬더니 무당님(?)께서 하신 말씀은..
“대학교 가면 안 뜯깁니다.”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말 같지만 당시의 나한테는 큰 안도가 되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자존심 상하게 삥뜯길 수는 없지 않나.. 그리고 이 긴장감을 평생 안고 가지는 않겠구나..
아무튼 거의 성인이 다 될 때까지 삥을 뜯긴 나의 삥 이력에 대해, 그중에서도 크게 기억나는 3번의 사건에 대해 말해보려고 한다.
첫 시작은 아무것도 모르던 초등학생 때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초등학교 정글짐 부근에서 놀고 있었는데 교복을 입은 언니들이 왔다.
(언니들이라 해봤자 뭔가 중1~2학년이었을 것이다.)
그 언니들이 정말 상투적이고 진부한 말로 가진 돈을 다 내놓으라고 했다.
다행히 돈이 없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돈을 뺏기는 것에 대한 인지를 하기 시작했고 삥을 뜯기기 직전의 증상이 발현되기 시작했다.
그 증상은 엉덩이가 바닥에 붙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삥 역사는 모두 부산 서면에서 이뤄졌다.
내가 초, 중, 고 학창 시절 내내 살던 곳은 그 서면이라는 동네였다.
특히나 삼보게임랜드 주변과 미니몰 주변으로 일진들이 진짜 많았고 좀 자질구레하게 논다 싶으면 1번가 쪽에 골목골목 상주해 있었던 것 같다.
그때는 지금처럼 네 컷 사진이 아니라 일본 특유의 왕눈알로 나오는 스티커사진이 유행이었는데 어린 맘에 그 스티커사진에 중독이 돼있었다. 그래서 친구와 둘이 아무 이유 없이 사진을 찍으러 서면 1번가로 진출했다. 서면 미니몰을 좀 지나서 뒷골목을 보면 사거리가 있는데 그곳을 향해 걸어가려고 하는 순간, 노래방 입구에서 어떤 언니 두 명이 나오더니 나와 친구를 그 노래방 입구 계단으로 끌고 갔다. 물론 너무 겁을 먹어 저항은 하지 못했다. 그래서 끌려간 게 아니고 그냥 같이 걸어간 걸로 볼 수도 있겠다.
아무튼 그쪽으로 데려가더니 ‘언니들이 차비가 없어서 그런데 돈 좀 빌려줘’라고 했다. 어린 마음에도 빌리는 게 돌려줄 의향이 없지만 ‘말이라도 예쁘게 해 본다’는 느낌을 받긴 했다.
어쩌면 자선사업가가 되었을 수도 있을 것 같은 나는 내 모든 주머니를 뒤집어까고 가방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교통카드까지 꺼내서 상납을 했다. 그리고 정확한 기억은 아닌데 ‘더 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이런 비굴한 말까지 했던 것 같다. 이 마음이 진심이었다면 나는 지금 구호단체에 들어갔어야 하는데.. 아무튼 옆에 있던 친구도 그런 나를 보고 같이 돈을 모조리 꺼내주었다. 친구와 나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돈이 많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그다음은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그때 패딩조끼가 유행이었는다. ‘폴햄’ 또는 ‘지오다노’의 패딩조끼를 입고 기분 좋게 교복을 입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한 50m 전에서 남학생 둘, 여학생 둘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야 거기 멈춰봐!”
참.. 이 순간은 아빠도 나한테 열받고 지금의 나도 나한테 열받는다. 왜냐하면 50m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었고 코앞이 집이었는데 그냥 나는 모르는 채 하고 집으로 달려갔으면 됐다. 그런데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알 수 없는 그 당시의 나는 그들이 부른다고 순순히 그들에게로 걸어갔다. 마치 운명에 이끌린 것처럼.
그들한테 갔더니 그들이 나보고 웃으랜다. 아니, 누가 봐도 교복이 다르고 나는 갓 중학교 입학한 학생 같은데 그분(?)들은 치마도 짧고 화장도 하고 바짓단도 줄였는데 웃으면 뭐 하나. 계급자체가 다른데..
나는 또 시키는 대로 나름 즐거운 표정을 지었고 그들과 함께 아파트 비상구로 들어갔다. 일단 시작은 내가 입고 있던 패딩조끼였다. 그걸 내놓으란다. 옷은 내놓기 좀 그래서 ‘이거 지난 주말에 엄마가 사준 거예요..’라고 말했더니 패스하고 넘어갔다. 어쩌면 그 사람들도 그렇게 악한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다음은 가방. 가방 안에는 클린 앤 클리어 훼어니스로션(90년대생 여학생들의 필수품), 토니모리 립스틱(엄마가 틴트를 안 사주고 립스틱 같은 걸 사줬던 걸로 기억한다. 그것도 생분홍색). 이런 내 소지품들이 다 꺼내지고 당시에 자존심으로 들고 다녔던 빈폴지갑도 꺼내졌다. 다행히 나는 용돈을 그렇게 많이 받지는 않아서 현금 4,000원이 있었고, 이번에도 교통카드도 같이 뺏겼다. 그리고 토니모리 립스틱도.. 도대체 남이 쓰던 립스틱은 왜 가져갔는지 모르겠다. 그 당시에 코로나19가 있었다면 생각도 못한 일일 텐데 말이다.
이렇게 알차게 ‘왓츠인마이백’을 하고 가진 것들을 그들에게 내어 준 뒤 나는 울면서 집으로 들어갔고, 퇴근한 아빠한테 사정을 설명하니 답답한 아빠가 다음부터는 멀리서 부르면 그냥 도망가라고 말했다. 당연한 말이다.
이후에도 중간중간 신발에 숨긴 2,000원도 뺏기고, 도서관에서 라면먹을 돈도 뺏기곤 했다.
그러다가 이제 대망의 고등학교 진학 후로 넘어간다.
고등학교 1학년, 나는 당시 어떤 티비프로그램의 예쁜 교복특집에 나온 학교의 교복을 입고 있었다. 다라이색 교복. 그리고 흔한 교복이 아니라서 누가 봐도 고등학생으로 보일 것이라 생각했다.
선생님한테 야자대신 서점에서 문제집을 사겠다는 이유로 조퇴증을 끊고 나와서 친구와 서면에 교보문고로 갔다. 아니, 가지도 못했지. 가는 길목에 지하도에서 올라오는 계단에서 누가 내 어깨를 세게 치고 갔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나는 약간의 자존심으로 “아 뭐야.”하면서 뒤돌아 쳐다봤다. 그렇게 짜증 내고 지나가려고 했더니 갑자기 그 어깨빵 한 사람의 일행 3명이 더 나타나더니 사과를 하고 가라는 것이다. 이때부터 삘이 안 좋았다. 그 삥 뜯기 때의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바로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하고 가려고 하는데 제대로 된 사과를 하라는 것이다! 뭘 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다시 한번 ‘정말 죄송합니다.’했다. 그랬는데 그분들이 사과가 맘에 안 든다면서 사과받으러 좀 가야겠다는 것이다. 내가 과수원집 딸도 아니고 도대체 얼마나 사과를 드려야 하는 건지.
그러더니 친구와 나를 분리시켜서 두 명씩 양쪽에 붙어서 어깨동무를 하더니 ‘웃어, 웃어’ 이러는 것이다. 그래도 고등학생인 나는 웃지는 않았다. 하지만 발은 그들과 맞춰 걷고 있었다. 서면에 사람도 정말 많았는데 소리 지를 용기도 없었다.
그리고 뒤쪽 ‘한국전력’ 주차장으로 끌려갔다. 친구와 나는 분리되어서 배치가 되었다. 나는 하필 그때 산 지 2주밖에 안 되는 노스페이스 빨간색 패딩을 입고 있었는데 그게 그들의 목표물이 된 것이었다..
그 패딩의 번호가 700이었다. 그게 25만 원이었는데 동생이랑 나랑 각 1개씩 샀기 때문에 엄마한테 미안함이 더 컸다. 그런 패딩을 빼앗으려고 하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빼앗기지 말아야 했다.
일단 첫 번째 수는 ‘구토’였다. 조금 더럽긴 하지만 옷에다가 토를 하면 그들이 도망가지 않을까 하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구토가 어디 쉽던가. 그 사람들 앞에서 아무리 헛구역질을 해대도 토가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하는 와중에 그들은 화가 점점 나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중 한 명이 ‘X간 칠까, 오빠들 부르까’라고 협박을 하는 것이다!! 그런 말을 하며 내 얼굴에 담배연기를 뿜었다.. 정말 무서웠다..
그때 이제 다른 수를 써야 했다. 그 순간이 되기 얼마 전 영화 ‘써니’를 보았고 주인공인 심은경이 패싸움을 할 때 눈을 뒤집어까며 욕을 해대는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욕은 익숙지 않았던 나.. 일단 눈은 뒤집어까고 온몸을 떨었다.
그들이 약간 놀란 것이 느껴졌다.
그러고 있는데 제일 어려 보이는 한 명이 갑자기 ‘얘 간질인 거 같다.. 119 불러야 한다. 안 그러면 죽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다!!
그대로 119를 불렀어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긴 한데, 간질을 생각지도 못한 내가 119 아저씨들을 상대로 간질을 연기할 용기는 없었다.
그래서 온몸을 떨면서 ‘아니.. 에요... 저 자주.. 발작을 해서.. 엄마 부르면 돼요..’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들 중 한 명이 엄마를 불러주겠단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착한 애였던가.. 그래서 나는 ‘엄마가 이 사실을 알면 당신들이 위험해질 거예요.. 우리 엄마 진짜 무섭거든요. 엄마는 제가 부를 테니 당신들은 그냥 가세요..’하면서 열연을 펼쳤다.
그렇게 말했더니 분리되어 있던 친구를 불러주었고 나의 친구한테 니 친구 원래 간질이 있었냐며 엄마 부른다는 데 좀 도와주라며 말을 했다. 그때 친구와 눈이 마주쳤는데 꽤 수치스럽긴 했다. 하지만 그렇게 악당들(?)을 물리쳤다.
나한테는 그 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모른다..
삥을 안 뜯겨 본 사람은 이런 일을 이해조차 못하는 것 같다. 뜯겨본 자도 이해를 못 하긴 하더라.
그때 나와 같이 있던 친구와는 아직도 친구로 남아있고 그 친구는 나 때문에 삥을 그렇게 뜯겼다고 말을 했다. (그 친구랑 나랑 둘이 있을 때 삥을 한 세 번 정도 뜯겼다..)
이러나저러나 나는 패딩을 지켜낸 그 순간이 자랑스러웠다. 그렇게 지켜낸 나의 25만 원짜리 빨간 노스페이스패딩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지금이야 이렇게 우스갯소리처럼 적을 수 있지 그 당시에는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그리고 성인이 되자마자 다짐을 하나 했었다.
‘성인이 된 나를 누가 삥을 좀 뜯으려고 해라. 그럼 내가 확 들이박아버릴 테니까.’라는 다짐.
하지만 무당의 예언처럼 대학생이 된 이후로 삥을 뜯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실 서른 살이 된 지금도 누군가 삥을 뜯어주길 바라고 있다.
나에게 맺힌 한(?)을 몰아서 참교육해 주기 위해서 말이다.
아래 사진은 당시 내가 뺏기지 않고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입었던 빨간 패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