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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침잠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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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항녀 Jul 03. 2024

알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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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자마자 알약 3알을 물과 함께 삼킨다. 처음에는 위가 약해 공복에 약을 먹는 것이 힘들었는데 어느새 그 고통에도 적응했는지 아무렇지 않다.


그녀는 출근하는 길이지만 기분이 좋다. 하늘에 떠있는 구름이 예쁘고 초록색의 나무가 흔들리는 것이 아름답다. 그 사이로 비치는 강하지 않은 아침의 햇살도 따뜻하다.


회사에 도착해 컴퓨터를 켜고 커피를 내려 자리에 앉는다. 커피 한잔을 마시며 오늘 할 일을 정리해 본다. ‘여기까지 한 거 보고하고.. 오늘까지 이거 마무리하면 되겠다. ’ 정리한 일들만 처리하면 오늘 걱정할 것은 없다.


오전 시간에 이 일 저 일 조금씩 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다. “윤대리, 오늘 점심 뭐 먹고 싶어?” 하고 부장님이 그녀에게 물어본다. 기분 좋은 그녀는 “오늘 부대찌개 어떠세요?”하고 대답을 한다. 부대찌개를 먹으러 팀원 5명이 모여서 간다.


하하하 호호호


점심시간에 수다 떠는 건 즐겁다. 부장님, 차장님 자녀들의 소식도 듣고 과장님의 새로운 애인에 대한 이야기도 듣는다. 신입직원은 어색하지만 밝게 웃고 있다. 그녀도 주말에 새로운 걸 봤느니, 저걸 사고 싶다느니 말을 한다. 마냥 즐겁다.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들어가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까지 양치를 하고 오후를 준비한다. 이겨낼 수 없는 졸림에 몇 번 고개를 끄덕이고 나니 오후 3시. 배도 조금 꺼진 것 같고 입도 심심해 탕비실로 가서 간식 조금과 커피를 또 내려 자리에 앉는다. 전화가 울린다. 그녀는 상냥함을 무기로 응대한다. “ㅇㅇ팀 윤혜리입니다. 네, 처리하고 연락드릴게요. “


아무런 문제 없이 퇴근 시간이 다가왔다. 약 먹을 시간이다. 가방을 뒤져 약이 든 파우치를 찾는다. 바로 보여야 할 파우치가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아침에 약을 먹고 그대로 식탁에 두고 온 듯하다.


큰일이다.


무섭다.


불안하다.


오늘 내가 처리한 일들이 무사히 끝났는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무언가가 잘 못 됐을 것만 같다. 퇴근길에 뭔가 잘 못 됐다는 연락을 받고 말 것 같다.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이 무섭다. 사람들이 무섭다. 나를 쳐다보는 것 같다. 내가 입은 옷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 같다. 지하철을 타는 것이 두렵다. 지하철 문이 열린다. 숨을

크게 쉬고 지하철에 오른다. 지하철이 어두운 지하를 달린다. 갑갑하다. 숨이 막힌다. 당장 여기서 나가고 싶다. 하지만 내린다고 해도 이 감정이 나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더 무섭다. 내리는 것조차 무섭다. 불안하다. 왜 지하철 자리는 마주 보게 만들었을까. 나는 고개를 푹 숙인다. 눈을 감는다. 눈앞에 계속 무언가 떠오르는 것 같다.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펼친다. 읽는다. 읽기만 하지 내용이 들어오지는 않는다. 덮는다. 가방에 넣는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의 다리가 내 다리에 닿는다. 폭발할 것 같은 불쾌감이 든다. 죽여버리고 싶다. 시한폭탄이 된 것 같다. 머리로는 안다. 이 모든 감정이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은 내가 느끼고 있다. 안다고 해서 공포가, 불안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녀는 다행히 집까지 도착했다. 너무 지쳤다. 그렇지만 당장 집으로 뛰어들어가 알약들을 먹어야 한다. 그녀는 안다. 약을 먹으면 아무렇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식탁 위 올려둔 파우치를 보자마자 약을 꺼내어 물과 함께 삼킨다. 위에서 약이 녹음과 동시에 그녀를 괴롭혔던 감정들이 사라진다. 평화를 찾았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다 헛웃음을 짓는다. 퇴근길에 그녀의 모습이 너무 안타깝기도 어이가 없기도 해서 웃는다.

그녀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무사히 집에 도착해서 잘 준비를 하고 있다.


내일도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알약들과 함께라면.


근데 어떤 순간이 그녀의 진짜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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