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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 면.

나의 파면이야기

by 반항녀

며칠 전 출장에서 복귀하는 길에 코가 너무 아파서 이비인후과를 갔다.


주사까지 맞고 나오는 길에 몸이 으슬으슬 아픈 것 같아서 뜨끈한 국물요리가 먹고 싶었다.

사실 아프지 않아도 뜨끈한 국물요리는 그냥 좋아한다.

이래저래 둘러보다 중국식(?)으로 추정되는 도삭면 집을 발견했다.


도. 삭. 면.


일단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었는데 칼로 자른 면이라.. 뭔가 손칼국수보다는 못 하겠지만 기계칼국수보다는 맛있지 않을까 해서 들어갔다.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들어가자마자 메뉴판을 보고 별 고민 없이 ‘파기름우육면’을 주문했다.


파기름과 도삭면에 소육수라니..


청경채가 올라간 ‘파’ 기름 우육‘면’.


생각보다 넓적한 면에 쫄깃함까지 너무 내 스타일이었다.


기분 좋게 먹고 나와서 따뜻해진 위장으로 출근을 했는데 감기고 뭐고 다 나은 기분이 들었다.

파면이 나를 치유해 준 걸까.


아, 파면하니까 몇 년 전 생각이 난다.

(전환이 어색한가?)

티비를 보면서 무언가를 해냈구나 했던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그 장면.


안방에서 티비를 켜두고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손에 땀까지 나게 했던 그 한마디.


“~를 파면한다.”

생소했던 단어지만 마치 오래도록 기다렸던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던 그 단어.


그리고 배신감으로부터 치유를 받는 느낌을 주었던 그 단어.


그리고 어제.


그 단어가 한번 더 나에게 조금의 치유를 준 듯하다.


내가 살아있음에도 지옥에 빠지게 만들었던 그 모든 순간들.

내가 내 손목을 바라보며 울게 만들었던 그 순간.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게 만들었던 순간.

내가 누구인지조차 잊게 만들었던 순간들을 만들어 준 그 대상에게 파면이 내려졌다.


안타깝게도 맛있는 ‘파’ 기름 도삭‘면’이 아닌 행정처분으로서의 파면이 그 대상에게 주어졌다.


그 소식을 듣는 그 순간 어떤 기분이었는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난다.


정의가 있다면 마땅해야 했고 그 사건을 보는 사람들이 분별이 있다면 그 단어를 뱉어야 했다.


약간 허무함도 들었다.


내가 받은 피해에 대한 판단을 타인에게 맡겨야 한다는 사실과 그 타인들이 내려준 판단에 아마도 ‘해방감’을 느껴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단어 하나로 오늘 아침 이 글을 쓰는 순간의 나는 지난 1년과 조금 다르게 몸무게는 변함없지만(안타깝다. 오히려 쪘다.) 마음은 가벼워진 듯한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그 일과 관련된 모든 일이 정리된 것은 아니다.

처분은 그렇게 내려왔지만 그 대상은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며 계속해서 싸울 것이다.

그리고 나는 굴국밥을 또 먹으러 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최소한 숨통은 트였고


그 맛있고 쫄깃한 파기름도삭면을 또 먹으러 갈 힘은 얻었다!


(사실 그저께 또 먹으러 갔다. 결과가 있기 전이어서 힘이 없어서 힘을 얻기 위해 먹었다고 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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