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부머 아빠가 MZ 아들에게 보낸 최후통첩

60년대생 아버지와 90년대생 캥거루 아들의 갈등은 해결될 수 있을까?

by 날개

베이비부머 세대 아버지가 MZ 세대 캥거루 아들을, MZ 아들이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까?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은 기본적으로 가족 내부의 역할 갈등이라고는 하지만, 특히 60년대생 부모와 90년대생 자식의 경우에는 시대의 경험의 차이가 극단적이므로 이로부터 비롯된 '사회적 세대 차이'가 가족 내부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다음은 이러한 갈등이 극한으로 치달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낸 장문의 카톡이다.


아빠도 이제 한계다. 그냥 나가 살아라 유전자 탓 사회탓 환경 탓하지 마라. 아빠도 엄마도 충분히 기다려줬다. 네 엄마나 나나 어려운 환경에서 컸고 먹고살기만 해도 바쁘고 힘든 시절이라 부모의 사랑을 많이 못 받고 자랐다. 그래서 결혼할때 우리 자식만은 행복하게 키우자고 약속했다. 너에게 언제나 최고는 아니더라도 최선을 다해주고 싶었다. 내가 먹고 입을거 참으며 네 옷, 먹는 거, 교육 모두 좋은 조건을 누리게 해주고 싶었다. 네가 방황하거나 철없이 굴때도 앞에선 혼냈지만 뒤에서는 우리가 못해줘서 그런가보다 하며 네 엄마랑 많이 울었다. 그래도 자식은 나보다 나은 삶을 살겠지, 나보단 선택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겠지, 이 생각만 하며 꼭 참으며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이게 뭐냐? 너 나이가 몇 인지 알긴하냐? 도대체 그 나이에 혼자서 할 줄 아는게 뭐냐? 늘 불만은 많으면서 실천하는게 뭐냔 말이다. 오늘 문득 우리가 널 잘못 키웠다는 생각이 든다. 거울을 보니 늙은 내 모습에 눈물이 나더라. 그냥. 이제 나가라. 나를 원망하지도 말고 네 힘으로 알아서 살아라. 아빠도 지쳤다. 당장 짐싸라.


한국의 60년대생 부모들은 “사랑받지 못한 세대”였다. 산업화 초입의 가난 속에서, 가족이라는 기본 단위는 생존이 우선이었고 애정은 사치였다. 이들은 자신을 돌보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고, 결혼 후엔 묵은 결핍을 뒤늦게 자식에게 ‘보상’하려 했다. 자식에게만큼은 사랑을 주고 싶다는 결연한 의지는 결국 헌신이라는 이름 아래 과잉보호로 흐르기 쉬웠다. 체면을 중시하고, 집안 문제를 집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했던 한국적 문화는 ‘과잉양육’이 가정 내부에서 더 깊이 굳어지게 만들었다. 사랑이라 믿었던 것들은 어느 순간, 자식이 스스로 설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형태로 변했다.


이런 흐름은 종종 극적인 문장으로 응축된다. “아빠도 이제 한계다. 그냥 나가 살아라. 짐싸라.” 아버지가 서른이 다된 아들에게 보낸 메시지는 단호해 보이지만, 그 밑바닥엔 30년 억눌러온 회한과 자기비판이 뒤섞여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널 잘못 키웠다는 생각이 든다. 네가 철없이 굴 때 앞에선 혼냈지만 뒤에서는 우리 탓인가 싶어 많이 울었다.” 부모의 투사는 사실상 ‘미해결 된 자기 자신’을 자식에게 이식한 셈이었다. 더 나은 조건을 마련해 주려는 마음은 선했으나, 한계와 경계를 가르치는 교육은 부재했다. 사랑을 주고 싶다는 욕망과 사회적 체면이 뒤엉켜 ‘오냐오냐’와 ‘오지랖’이 결합하면서, 자식의 성장은 늦춰졌고 부모의 노화는 더 빨리 찾아왔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남은 건 제 나이가 몇 인지조차 실감하지 못한 채 부모 집에 머무는 “늙은 캥거루”와, 거울 속 노쇠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눈물이 난다는 아버지였다. 결핍의 대물림은 조용히 진행되었으며, 어느 누구의 악의도 없었다. 문제는 사랑의 과잉이 오히려 자식의 ‘분리 개별화’를 방해했고, 부모는 현실을 외면한 채 체면으로 포장한 결과, 가족 전체가 서로를 가두는 구조가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한국적 가족주의와 오지랖, “남들이 뭐라 하겠냐”는 압박은 이 구조가 더 굳어지도록 만들었다. 아버지의 뒤늦은 폭발은 결국, 오래 미뤄온 진실의 표면화였다.


그러나 “당장 나가라”는 말처럼 이 문제가 단칼에 해결되지는 않는다. 이미 경제적 기반도, 자기 규율도 갖추지 못한 자식을 갑자기 분리시키는 것은 사실상 새로운 파국을 낳을 수 있다. 부모 역시 진심은 복잡하다. 내보내고 싶지만 걱정되고, 책임을 벗고 싶지만 죄책감이 따른다. 이 가족이 겪는 갈등은 개인의 문제이기보다, 한국 사회 곳곳에서 반복되는 구조적 현상이다. 부모 세대의 결핍, 체면문화, 취업난과 저성장, 그리고 자식세대의 정체감 상실이 얽혀 만들어낸 한 가족의 초상이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우선 부모의 각성이 먼저다. 사랑은 통제나 대리만족이 아니라 ‘경계 짓기’라는 사실을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인정해야 한다. 부모가 자신의 통제권을 내려놓고 '경계 짓기'를 실천해야 하고, 자녀에게 '경제적 지원'이라는 당근과 '단호한 원칙'이라는 채찍을 함께 제시하는 구조화된 협상을 통해 자녀 스스로 발을 딛고 서게 만드는 장기적인 훈련 과정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부모가 먼저 심리적으로 건강해져야 지치지 않고 이 힘든 과정을 이끌어갈 수 있다. 즉,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가 죄책감 없이 자녀의 삶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것이다. 부모가 스스로의 삶을 되찾는 것이 자녀에게 주는 가장 큰 '기다림'이자 '독립 교육'이 될 수 있다.


현실적으로는 점진적으로 분리를 실행해 나가는 것이 최선이다. 이제는 정말 마지막으로 경제적 완충장치를 단계적으로 마련해 주되, 생활·취업·자기 관리 등 최소한의 자기 유지능력을 훈련하도록 현실적인 조건을 설정해야 한다. “무조건 나가라”가 아니라 “3개월 후엔 A, 6개월 후엔 B를 스스로 해내야 한다”는 구조화된 분리 시나리오와 이에 대한 상호 간의 동의, 필요하다면 계약서 작성도 해야 한다. 부모는 뒤에서 최소한의 안전망만 유지하고, 정서적 개입은 줄이며, 자식이 시행착오를 겪도록 내버려 둘 용기를 가져야 한다. 체면을 버리고, 주변의 오지랖을 차단하는 것도 필수다. 가족 문제를 남의 잣대로 평가받는 시대는 이미 끝났다.


아버지의 메시지는 단지 분노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 가족문화가 안고 있는 오래된 상처의 표출이며, 이제는 방향을 바꾸라는 신호다. 부모가 결핍을 자식에게 투사하지 않고, 자식 또한 부모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 새로운 관계 설정이 필요하다. 늙은 캥거루도, 늙은 부모도 더 이상 서로의 그림자 속에서 생을 소모해서는 안 된다. 이 문제의 해결은 ‘누가 잘못했는가’가 아니라 ‘이제부터 무엇을 다르게 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뒤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진짜 분리는 시작될 수 있다. 그것이 서로를 살리는 길이다.


그래서 매우 어렵겠지만, 무엇보다 대화 시도나 메시지 교환을 통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소통하려는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아들은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장을 늦지 않게 꼭 보내야 한다.


아버지, 보내주신 긴 메시지를 여러 번 읽었습니다. 처음엔 충격이 컸지만, 곱씹어보니 그 안에는 분노보다 슬픔이 더 많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빠도 이제 한계다”라는 말, 그리고 “거울 속 늙은 내 모습”이라는 말은 제게는 꾸짖음보다 부모로서의 절망과 자기반성처럼 들렸습니다. 그것이 더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저는 그 메시지를 단순히 “나가라”는 명령으로만 받지 않겠습니다. 그보다는, 오랜 세월 쌓여온 서로의 기대와 부담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절규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제 나이가 적지 않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제 또래 많은 사람들이 제 몫의 삶을 이미 시작한 나이라는 것도요. 그런데도 집에 머물며 낮밤이 바뀐 채 바깥으로 방황하고 머뭇거리는 제 모습이 아버지에게는 얼마나 답답하고 한심하게 보였을지, 상상해 보면 숨이 막히고 이해도 충분히 갑니다. 그러나 아버지도 아시는 것처럼, 저는 어려서부터 큰 그늘 아래 자랐습니다. 부족하지 않게 자라고, 실수할 때마다 바로 뒤에서 손을 내밀어주는 부모님을 보며… 저는 언제부터인가 스스로 판단하고 위험을 감수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온전히 “제 탓”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가정의 방식에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남 탓으로 돌리려는 것이 아니라, 왜 우리 가족이 여기까지 왔는지를 냉철하게 정확히 보자는 것입니다. 부모님 세대가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채 자라서, 그 상처를 자식에게는 절대 반복하지 않으려 애쓴 것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늘 과잉의 배려가 있었고, 그것이 저는 “사랑”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것이 사랑만이 아니라 불안과 체면의 결합이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한국적 가족의 오래된 습관—“남들 앞에서 우리 아이만큼은 흠 잡히면 안 된다”,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줘야 한다”, “혹시 실패하면 부모 책임이다”—이 저를 오히려 더 지체시키고, 부모님에게는 더욱 지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든 데에 한몫한 것 같습니다. 이제 저도 압니다. 부모의 헌신은 시간이 지나면 둘 중 하나의 얼굴로 변합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발판 삼아 뛰어오르고, 누군가는 그 울타리에 길들여져 스스로 걸을 힘을 잃어버립니다. 저는 안타깝게도 후자에 더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영원히 이렇게 살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현실의 불안과 미숙함이 겹쳐진 제 삶의 속도가 부모님 기대보다 느렸던 것뿐입니다. 이것은 변명이라기보다는, 제가 살아온 정직한 상태입니다. 아버지의 메시지를 받고, 저는 두려움과 동시에 어떤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이젠 정말 달라져야겠다는 결심이 마음 깊은 데서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도 아시겠지만, “당장 짐 싸서 나가라”는 방식은 해결이 아니라 또 다른 파국일 뿐입니다. 서로 상처만 더 깊어질 겁니다. 현실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우리는 그렇게 끝낼 수 있는 가족이 아닙니다. 대신 저는 조금씩 분리해 보겠습니다. 경제활동 범위 안에서 우선 단기적으로 독립 연습을 해보고, 생계를 위한 일부터 차근차근 잡아나가겠습니다. 그리고 집에서도 지금까지처럼 부모님께 전적으로 기대는 삶이 아니라, 역할과 책임을 나누는 방식으로 전환해 보겠습니다. 완전한 독립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방향 자체는 무조건 그쪽으로 옮기겠습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메시지가 미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제는 네 삶을 네가 살라”는 마지막 사랑의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 탓도, 제 탓도 아닌 세월의 결과물이라면, 이제 그 굴레를 함께 벗어날 때입니다. 저도 제 몫의 삶을 찾겠습니다. 아버지도 이제 제 인생을 내려놓고, 아버지 자신의 시간을 되찾아 주세요. 그게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건강한 미래 같아요. 그러니 저를 버려야 한다는 마음으로 이 메시지를 보내신 거라면,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이제 스스로 서보겠습니다. 아버지는, 이제 조금 편히 숨 쉬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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