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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돌 씨

by 박정옥


바람 한 점 없는데도 느티나무에서 가을 잎이 꽃잎처럼 날리고 툭 하고 잔가지도 떨어져 내린다. 한 해의 반환점을 지나 끝점을 향하는 계절이다. 나무는 찬란한 영광을 털어내어 몸피를 가볍게 하고 다음을 위해 비우고 또 비우는 것처럼 보인다. 멍하니 창밖의 느티나무를 보고 있는데 문득 까맣게 잊었던 순돌 씨가 생각났다.


순돌 씨는 우리 집 뒤편에 살았다. 그 집은 방 한 칸, 정지 한 칸의 초가였다. 흙바닥인 정지에는 검정 솥이 걸려있고 대나무 조각으로 엮은 살강이 벽에 달려있었다. 방 앞에는 오도카니 툇마루가 놓여있고 자갈돌로 만든 장독대에는 반들반들 윤나게 닦아둔 서너 개의 항아리가 있었다. 그 옆에 봉숭아며 맨드라미 등이 피어있어 가끔 벌 나비가 날아다녔다. 그녀는 봉숭아 꽃잎을 찧어서 손톱 위에 올리고 내 손톱에도 올려주었다. 처음 느껴본 봉숭아 꽃물이란….

그는 명절이나 기제사가 되면 우리 집에 크고 좋은 조기 한 손 사 오는 걸 잊지 않았다. 조기는 제사상에서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그땐 차례나 제사에 정종이나 쌀 됫박, 때론 가을무 서너 뿌리나 잎채소 한 바구니로 정성을 표하던 시절이었다. 생각하면 큰 조기는 그의 자존심이었던 것 같다. 어느 명절날 일가친척들이 모여서 차례를 지내는데 순돌 씨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부재를 물어보는 내게 엄마는 “일이 있겠지.” 하고 얼버무렸다. 그때부터 순돌 씨는 차례를 지낼 때 오지 않았다.

순돌 씨는 3남매의 맏딸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일찍 결혼했다. 남은 두 동생이 있는 집이 친정이고 명절 차례는 동생들이 지냈다. 그의 집에 가끔 왔던 동생들은 호리호리하고 얼굴도 갸름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중키에 살집이 있고 얼굴은 둥글 납작하고 눈이 컸던 순돌 씨와는 닮지 않았다. 그 동생들이 집을 나가서 소식이 끊기자 순돌 씨가 친정집 차례를 챙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눈치 주지 않는 남편의 눈치를 살피며 친정 부모님 기제사를 정지에서 지냈다. 꼬장꼬장하며 위엄이 있던 집안 할머니가 “아무리 죽은 귀신이지만 사돈댁 안방에서 제사상을 받으면 안 된다.”라고 한 것이었다. 그리하면 시가의 조상이 화를 내며 후손들을 해코지한다는 것이다. 성질은 불같아도 아내를 아꼈던 그의 남편도 보고만 있었다. 혹시나 하는 자식 걱정 때문인지, 할머니의 서슬 퍼런 입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순돌 씨는 그곳에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키우다가 부산으로 이사 갔다. 어디에서든 몸뚱이로 일해서 살아야 하는 그들은 좀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도회지로 간 것이다. 도시로 간 그는 아들 둘을 더 낳았고 시골 살 때보다 하얗고 밝은 얼굴로 명절을 쇠러 오곤 했다. 여전히 크고 질 좋은 조기와 우리 식구들 양말을 사서 남편 편에 보내고 그는 다음 날 왔다. 명절을 전후해서 일가친척과 친척 동생들이 오고 집에는 사람 사는 냄새로 북적거렸다.

약간 더듬는 말투였던 순돌 씨는 “…… 행님.” 하면서 도회지 생활과 소식을 알게 된 동생들에 대해 숨차게 풀어냈다. 우리 뒷집에 살 때 박명에 와서 “… 행님” 하며 땟거리가 없다고 엄마를 찾던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 밝은 모습도 잠깐, 두어 해 지나고 나서 그는 눈언저리에 검 붉은 멍 자국 가득한 얼굴로 찾아왔다. 남편이 바람이 났다며 마음보다 느리게 나오는 말로 서럽게 토해냈다. 남편이 여러 달 생활비를 주지 않아서 안락 로터리 삼거리에서 씨앗을 품은 그녀와 싸웠단다. 머리채를 잡고 싸우다가 남편에게 맞았다고 했다. 치유되지 않을 악몽의 세월은 지워지지 않는 화인처럼 그의 가슴에 찍혔다.

경남 창원이 산업단지로 활성화되었을 때 순돌 씨 가족은 부산에서 그곳으로 이사 갔다. 내가 첫 아이를 가지고 창원에 갔을 때 그는 환한 웃음으로 반겨주고 곧장 시장으로 가서 내 임부복과 찬거리를 사 와서 맛있는 밥을 지어주었다. 마루와 부엌이 딱히 구분이 없는 넓은 공간을 보면서 문득 순돌 씨는 이제 제사를 마음 편히 지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시골을 떠나고부턴 편히 부모님 제사를 모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친정집 차례를 재래식 부엌에서 지내던 일은 늘 내 가슴에 부당한 일로 남아있었다.

순돌 씨는 자식들이 직장에 잘 다니고 결혼하여 손주도 여럿 보았다. 막내아들 하나만 품에 남았다. 그 시절 그의 얼굴은 밝고 기쁨이 넘쳐나 보였다. 그러나 동생들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무성한 소문만 들려올 뿐.

그해가 몇 년도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초여름 장마가 계속되던 어느 날 폭우로 인해 창원 모 터널이 무너졌다는 뉴스를 보았다. 터널을 지나던 승용차가 흙더미에 깔렸고 차 안엔 남녀 두 사람이 있었다. 어떤 연유인지 그날 바로 무너진 토사를 치우지 못했다. 하루가 지나서 겨우 흙더미를 치우고 보니 남자는 운전석에 엎드린 채 숨져있었다. 옆 좌석에서 죽은 여자는 손톱이 다 빠지고 얼굴과 손이 상처투성이로 알아보기 힘들었다고 했다.

그 여자가 순돌 씨 딸이다. 직장 동료의 차를 타고 퇴근하던 길이었다. 생사가 갈리는 그 순간이 어떤 시간이었을지 누구도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순돌 씨나 그의 남편이 아들 셋보다 더 귀히 여겼던 고명딸이었다. 순돌 씨는 죽을 만큼 힘들어도 사위와 싸우느라 아파하거나 슬퍼할 수 없었다. 직장 다니던 딸을 위해 돌보던 어린 손녀를 키우기 위해서였다. 죽음의 순간에도 가슴에 새겼을 하나뿐인 딸의 핏줄이다. 그 사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재혼했고 순돌 씨는 손녀를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보살폈다. 손녀는 순돌 씨의 또 다른 딸이 되었고 그 딸을 키우면서 그도 살아낼 수 있었다.

순돌 씨는 나의 숙모다. 아버지와 삼촌, 엄마와 숙모까지도 어떤 일로 해서 풀 수 없는 몇 겹의 세월을 보냈다. 아버지와 삼촌은 매듭을 풀지 못하고 다 돌아가셨다.

숙모도 엄마처럼 건강이 안 좋을 연세인데, 왜 이렇게 오래도록 마음을 닫고 살았는지…….

아버지 기일에 동생네 갔다가 숙모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했다. 며칠 후, 아직도 품에 남아있는 막내와 지낸다는 소식과 메시지를 받았다.

「연락처-이름: *순돌, 휴대전화: 010-****-**88」

‘순돌’ 남자 이름 같다고 평소 당신의 이름을 싫어했던 숙모인데…….

아직도 아픈 기일들을 홀로 챙길까. 품에 남은 막내와 손녀를 위해 가슴 바닥에 남은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계시겠지.

어른들의 오해가 상처로 남았던 세월을 어떻게 비집고 들어가야 할지 버거웠다. 용기를 내기보단 외면한 시간으로 지금에 이르렀다.

“숙모예~” 하고 불러보고 싶은데, 나는 며칠이 지나도 번호만 들여다보고 전화를 하지 못하고 있다.


선수필 25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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