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미두사의 공작 쿠라토 글라키에사는 첫 부인 페로니아가 죽은 지 삼 개월 만에 새 부인을 맞아들였다. 그 재혼으로 공작은 행복해졌고 그의 딸 나이아시스는 불행해졌다.
새로 들어온 공작 부인 샬린은 처음부터 시스를 싫어했다. 시스는 공작과 페로니아의 친딸이 아니었다. 얼마 전 막 아홉 살이 된 시스도 아는 사실이었다. 페로니아가 죽기 직전 시스에게 남긴 말들 가운데 그 사실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페로니아는 살아생전 시스를 지극히 아끼고 사랑했다. 그러나 공작으로 말할 것 같으면 시스를 떠안긴 사람들이 페르베아투의 국왕과 대사제였기 때문에 그들의 부탁에 대한 의무를 다할 뿐이었다.
샬린은 곧 임신을 했다. 자식이라고는 피도 섞이지 않은 딸 시스 하나뿐이던 공작은 뛸 듯이 기뻐했다. 샬린은 공작을 꼬드겨 시스를 먼 곳으로 보내 버리기에 이르렀다.
시스가 보내질 곳은 루나리아의 텔룸이었다. 텔룸은 루나리아의 세력 하에 있긴 하지만 사실상 거의 자유도시에 가까웠고, 티토니아 대륙 전체에서 학문과 교육의 중심으로 꼽혔다. 티토니아 대륙 유일무이의 대학인 오티움이 텔룸에 있기 때문이었다.
명성과 자부심이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오티움에는 대륙 전역으로부터 유학생이 모여들었다. 오티움에 입학하려면 16세 이상이 되어야 하지만 더 어린 나이부터 텔룸에 와 공부하는 경우도 많았다. 오티움의 입학 시험은 몹시 어려웠으며 면접 또한 까다롭기로 악명 높았다.
오티움 입학시험 준비를 텔룸에서 하면 유리한 점이 있었다. 미리부터 텔룸의 별저나 고급 하숙집에 머물면서 오티움의 교수나 우수 학생을 과외 교사로 초빙해 예비 교육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샬린과 쿠라토 공작에게 오티움 예비교육이라는 것은 좋은 명분이 되었다. 어린 시스를 텔룸으로 치워 버릴 그럴듯한 명분.
시스는 후작 미망인인 레이디 앙켑세라의 저택에서 하숙하기로 결정되었다. 앙켑세라가 직접 시스를 데리러 왔다.
겉치레에 불과한 환송을 받으며 시스는 일말의 미련도 없이 포르미두사를 떠났다. 거의 빈손으로 내쫓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페로니아가 시스에게 남긴 황금이며 보석함이며 귀중품들은 샬린이 모조리 가져갔다. 샬린은 냉정하게 말했다.
“그것들은 전부 글라키에사 가에 속한 것이잖니? 넌 실질적으로 글라키에사 가의 그 무엇에도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입장이고.”
똑똑하고 조숙한 시스는 귀금속이나 재물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단 하나 가슴이 미어지도록 슬픈 것은 돌아가신 어머니 페로니아의 모든 흔적들로부터 추방당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샬린.”
그녀에게 작별의 말을 하기 위해 시스가 입을 열었다. 공작 부인도 레이디 글라키에사도 아닌 샬린이라고 부른 것은 의도적이었다.
샬린의 아버지가 가진 작위는 자작이었다. 시스의 새어머니 자리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샬린은 공작의 딸인 시스보다 낮은 지위였다.
대놓고 달랑 이름만을 부른 것은 시스가 그녀를 새어머니로도 공작 부인으로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런 맹랑하고 막돼먹은 것을 보았나. 난 엄연히 포르미두사의 공작 부인이야. 호칭 제대로 쓰지 못해?”
공작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멀찍이 떨어져 있었기에 샬린도 주저 없이 막말을 내뱉었다.
“샬린. 들려줄 말이 있어.”
“아니 이것이? 타국의 사생아 주제에 누구한테 감히.”
샬린의 매운 손바닥이 시스의 뺨을 갈겼다. 시스는 잠시 비틀했으나 곧 다시 자세를 꼿꼿이 했다.
“잘 들어, 샬린.”
눈동자에 이채를 띠고는 터진 입술에서 흘러나온 피를 혀로 핥는 시스의 모습에 샬린은 질려 버렸다.
시스는 다른 인격이 된 것 같았다. 이상하게 번뜩이는 눈빛은 어린아이의 그것이 아니었다. 아니 아예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속한 듯한 눈빛이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낀 샬린은 시스의 다른 쪽 뺨을 겨냥해 들어 올렸던 손을 제풀에 슬그머니 내리고 말았다.
“당신 뱃속의 그 아이는 딸이야. 다시 임신을 해도 계속 딸을 낳을 거야. 그럴수록 너의 공작님은 아들을 원할 거고. 그러나 여신께서는 너에게 아들을 주지 않으시겠대. 샬린. 너는 오늘 나에게 피를 보게 한 것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죽을 때까지 후회하게 될 거야.”
시스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자신 안의 또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입을 빌려서 말하는 것 같았다.
샬린이 어깨를 떨며 뒷걸음질 쳤다. 불길하고 명확한 느낌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저 섬뜩한 입에서 나온 말이 자신을 옥죌 무서운 예언이 되리라는.
그런 샬린을 향해 시스가 차가운 미소를 보이고 돌아섰다.
앙켑세라를 따라 마차에 올라탄 시스는 텅 빈 눈으로 한참 동안 인형처럼 앉아 있더니 갑자기 졸도해 버렸다.
시스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멀쩡하게 깨어났지만 며칠이 가도록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자꾸 말을 시키던 앙켑세라도 결국 지쳐 포기했다.
마침내 솜다리 여관에 도착했다. 솜다리 여관이 유명한 것은 호수 쪽으로 돌출된 높은 언덕배기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는 호수를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장소였다.
사람들은 그 호수를 님파 라쿠스라고 불렀다. 요정의 호수라는 뜻이었다. 광활한 호수 가운데에는 숲으로 우거진 섬이 있었다. 그 섬은 루쿠스 즉 신성한 숲으로 불렸다.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은 호수와 섬을 둘러싼 기이한 현상 때문이었다. 이 호수와 섬은 뒤엉킨 계절 속에 있었다. 또한 인간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마법이 걸려 있다 했다.
섬의 숲은 계절과 무관하게 언제나 새하얀 얼음꽃으로 뒤덮여 있었다. 호수는 잔잔했지만 건널 수는 없었다. 배를 띄우면 가공할 위력의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사람이 뛰어들면 난데없는 소용돌이가 일었다.
호수는 인간의 손을 탄 모든 걸 집어삼켰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잔잔해지곤 했다.